우암회.(고등학교 동문 모임)

우암회 2일째 여행은 충청남도 예산군에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고택을 돌아보고서.

용암2000 2014. 7. 27. 08:09

둘째날 : 7월 20일(일요일)

 

3) 예산군에 있는 추사 선생님 고택으로 가는 길.

해미읍성 앞에 세워둔 주차장으로 내려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 방향으로 떠나가는데, 우리부부는 여기 해미읍에서도 대구로 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기에 다소 불편하여 40번과 45번 국도를 이용하여 예산으로 넘어가 당진-대전 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 한다.

해미읍성에서 홍성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이내 예산방향으로 들어가는 조그마한 고개를 넘어서면 오른편으로 수덕사의 뒤편에 있는 덕숭산 언지리와 덕산온천 앞에 있는 응봉산 언저리를 지나가는데, 2개의 산은 몇년 전 산악회 따라 산행하여 본 산이라 산맥의 능선이 매우 친근감이 묻어난다.

2개의 산을 통과하자 마자 이내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예산수덕사 Toll gate가 나타나지만, 몇일 전 제주도 여행 때 유배지를 방문한 추사(秋史) 선생님의 고택이 인접하게 있다는 것을 인지하므로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어 그곳으로 찾아가 돌아보기로 한다.  

 

4)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고택 방문.

삽교읍시가지를 통과 함과 동시에 예산시가지 방향으로 조금 가다가 다시 삽교천 방향으로 들어가는 과수원길 따라 한 20분 정도 운전하여 가면 작은 야산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님의 고택 주차장에 도착한다. 

 

 < 주차장 내 "추사기념관" 을 알리는 입간판 >

 

넓은 주차장 한 모퉁이에 주차를 하고 먼저 안내소를 방문하여 팜플렛 한장을 수령하고, 주차장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추사 기념관으로 들어가 추사 선생님의 일대기를 관람하기 시작한다.

 

< "추사 기념관" 으로 들어가는 입구 >

 

< 추사 기념관 오른편에 있는 "추사" 동상 >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1786년 6월 3일 이곳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나는데, 추사는 영의정 "김홍경(金興慶)" 의 고손이며 또한 영조의 부마인신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이고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 의 아들로 태어나지만 백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간다.

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써 벼슬은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당시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약 10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말년에 생부 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철종 7년(1856년 10월 10일) 71세의 일기로 작고하였는데, 1937년 이곳 기념관 우측 야산 비탊면에 그의 첫번째 부인 한산이씨와 두번째 부인 예안이씨와 함께 합장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북학파의 거벽(巨擘)으로서 청조의 고증학풍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경학, 금석학, 문자학, 사학,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박통하였고, 북한산 기슭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순수비 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특히 저서로는 완당집(阮堂集), 예당금석과안록, 실사구시설, 완당척독, 담연재시고 등이 있고, 이와 같이 넓고 깊은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한 추사 선생님은 예술의 시(詩), 서(書), 화(畵), 전각(篆刻) 등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다.

서도(書道)는 추사체라는 독자일문(獨自一門)을 열어 서예사상 지고의 경지를 이루고, 작품으로는 묵란도(墨蘭圖), 묵죽도(墨竹圖)와 더불어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 등을 남긴다. 

전시실 입구로 들어가면 추사 선생님의 성장 배경과 더불어 그의 부친 김노경을 모시고 중국을 방문하여 추사에게 금석학과 서예를 가르킨 "옹반강과 완원" 2분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학문을 연마한 내용이 잘 기술하고 있다.

 

  <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평가 글 >

 

< 추사 선생님에게 학문을 전수한 2명의 "중국" 인의 스승 >

 

아울러 기념관 곳곳에 추사 선생의 저서 및 서예, 현판 등의 글씨를 대면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추사 선생이 기거한 고택과 학문을 연마하는 사랑채 모습 등의 모형도 함께 전시하고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여 준다.

 

< "추사" 선생님이 저술한 책 >

 

< 추사 선생님이 쓴 "시, 서, 화" 작품 >

 

< 추사 선생님이 쓴 "추사체 글씨" >

 

< 추사 선생님이 저술한 "서적" >

 

  < 추사 선생님이 태어난 "고택" 모형도 >

 

< "사랑채" 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모습 > 

 

다른 Booth로 이동하면 추사 선생님이 제주도 유배 생활 동안 추사체를 완성하는 과정과 더불어 국보 세한도를 그린 배경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고, 또 다른 Booth에는 이런한 내용을 종합한 영화가 연속적으로 상영하므로 인하여 추사 선생님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 제주도 유배 생활 때 만든 "작품" 소개 >

 

< 추사 선생님이 남긴 "이야기" 모음 >

 

< 추사 선생님이 사용한 각종 "인장" >

 

추사 기념관 입구에 별도의 기념품 판매 코너가 있어 잠시 들어가 구경하여 보는데, 여기에 판매 및 전시하고 있는 상품은 일반적인 관광지에서 판매하는 물건과 차별화가 되므로 오래 동안 머물면서 구경하지만 어디를 방문하나 빈약한 호주머니 사정으로 그냥 발길을 돌여야 하는 비애를 느낀다. 

 

< 전시관 입구 "기념품" 을 판매하는 곳 >

 

< "세한도" 를 소재로 하여 만든 상품 >

 

< 판매하기 위하여 진열하고 있는 "상품" >

 

이렇게 추사 기념관을 먼저 돌아보고 기념관 오른편으로 이동하면 야산의 기슭면에 추사 선생님 묘소가 보이고 있는데, 이 묘소에는 석상과 더불어 망주석 1쌍이 죄우에 배치하고 있다.

 

< 추사 기념관 오른편 야산에 있는 "추사 묘소" >

 

< 추사 선생님 묘소 옆에 있는 "휴식처" >"

 

다시 오른편으로 계속하여 이동하면 추사 선생의 묘소 옆에 고택과 묘소를 돌보는 관리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고, 관리사 오른편으로 우물 한기가 자리하고 있다.

 

< 추사 고택과 묘소를 관리하는 "관리사" 건물 >

 

추사 선생님 어머니 유씨가 24개월 만에 추사를 낳았다고 하는데, 그 때 샘물이 갑자기 마르고 마을 뒤편 팔봉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가 추사가 탄생하고 나서 부터 샘물이 다시 솟았고 나무들도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 관리사와 고택 사이에 있는 "우물" >

 

이 우물 오른편 옆으로 추사 선생님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대왕의 부마이신 월성위(月城尉) "김한신" 께서 1700년 대 중반에 약 100평 부지 위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 선생님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몇단의 돌계단 위에 솟을대문을 통과하여 사랑채에 도착하면 사랑채에는 남쪽에 1칸의 방과 동쪽에 2칸의 온돌방으로 구성하면서 대청과 마루가 있는 "ㄱ" 자형의 집으로 건립되어 있다.

< 추사 고택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 "ㄱ" 자 형태의 사랑채 >

 

이 사랑채 앞에 있는 정원에 돌기둥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돌기둥에는 해시계의 받침대로 사용하였으며 돌기둥 전면에 "석년(石年)" 이라는 글씨는 추사 선생님의 아들인 김상우(金商佑)가 추사체로 쓴 것을 각자한 것이라고 한다.

 

< 해시계의 받침대로 사용한 "돌기둥" >

 

사랑채를 돌아 안쪽으로 들어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는데, 대문을 통과하여 안채 마당으로 들어서면 안채의 구조는 "ㅁ" 자형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는 6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너방이 자리하고 있다.

 

 < 사랑채 뒤편에 있는 "안채" >

 

 <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 >

 

안방 및 건너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이 빙돌아서 건축되어 있는데, 안채 내부로 바람 한점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ㅁ" 자 형으로 포근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ㅁ" 자 형태의 안채 내부 모습 >

 

이 안체에서 남쪽 방향으로 나가는 협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와 안채 뒤편으로 돌아가 올라가면 추사 선생님의 영전을 모시고 있는 "영당(影堂)" 이 자리하고 있는데, 영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양쪽으로 있어 보통 왼편 쪽문으로 들아가 참배를 끝내고 오른편 대문으로 나가도록 한다.

 

< 안채로 들어가는 남쪽 방향의 "협문" >

 

< 안채 뒤편 "영당" 올라가는 쪽문 >

 

< 영당 내에 있는 추사 선생님의 "영전" >

 

 < 영당 반대로 나오는 "대문" >

 

이렇게 추사 고택을 관람하고 나서 밖으로 나와 오른편 방향에 있는 소나무 숲을 지나면 야산의 기슭면으로 무덤 한기가 나타나는데, 이곳 무덤이 추사 선생님의 증조부님과 그의 부인 "화순옹주(和順翁主)" 의 합장 묘소이다.

 

< 추사 고택 오른편에 있는 "쉼터" >

 

 < 쉼터를 지키는 2쌍의 "학" >

 

< 추사 "증조부와 화순옹주" 의 합장 무덤 >

 

이 묘소에는 돌담장으로 둘려쌓여 있으며 문인석 한쌍과 망주석 한쌍, 장면등 한기와 더불어 묘석이 구비하고 있으며 장명등 오른편으로 비문 한기가 서 있는데, 이 비문은 영조가 쓴 어필이 새겨져 있다. 

 

< 추사 증조부 묘소 앞에 있는 "석물" >

 

이 묘사 앞에 2그루의 백송(白松)이 자라고 있는데, 왼편에 있는 백송은 많이 성장하므로 인하여 튼튼한 소나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오른편에 있는 백송은 아직 어리므로 줄기에 완벽한 흰색를 띄지 못하고 있다.

 

< 묘소 앞 왼편에 있는 "백송" > 

 

< 묘소 앞 오른편에 있는 "백송" >

 

이곳 묘소를 지나 오른편 옆으로 들어가면 8칸의 솟을대문을 가진 정려문(旌閭門)을 만나는데, 이 정려문은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문으로 입구 현판에는 화순옹주의 열녀를 기리는 현판이 붙어있다. 

 

< 증조부 묘소 오른편에 있는 "정려문" >

 

영조는 2명의 아들과 12명의 옹주(翁主)를 생산하였는데, 자식에 대한 복이 없어서 그런지 한명의 아들은 일찍 죽음으로서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정조의 아버지가 되는 사도세자가 탄생하므로 너무너 기뻐 바로 세자로 책봉하였지만 잘못된 당쟁의 산실로 뒤주 속에서 죽음을 가지도록 방치한다.

그러고 12명의 옹주도 대부분 일찍 죽음으로 인하여 3명의 옹주가 살았는데, 그 중에서 화순옹주는 영조의 차녀(次女)로써 추사 선생님의 증조 할머니가 된다.

하지만 화순옹주도 지아비 월성위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므로 인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지아비 따라 죽음을 선택한다.

그래서 영조가 대노하여 아무리 만류 하였지만 아버지 령(令)을 어기고 죽음을 선택하므로 부왕의 뜻을 저버린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정문을 내리지 않았지만 후에 정조가 고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열녀문(烈女門)을 내리는데,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가 되어진다고 한다.

 

< 정조가 내린 "열녀문" 현판 >

 

< 정려문 내부에 있는 "주축돌" >

 

이 화순옹주 정려문 옆으로 "예산 백송조각공원" 이 자리하고 있는데, 공원에는 수 많은 시비와 조각품이 전시하고 있음과 동시에 시비와 조각품 사이에 수십 그루의 어린 백송들이 자라고 있다.

 

< "백송조각공원" 을 알리는 입석 >

 

< 조각공원 내에 있는 "시비" >

 

< 조각공원 내에 자라고 있는 애기 "백송" >

 

여기 백송조각공원 까지 추사 고택과 연관되는 전시실 및 묘소 등을 관람하는 사적 영역이 되므로 인하여 관람을 끝내고, 다시 주차장 입구에 있는 승용차를 몰고 백송조각공원을 통과하여 한 모퉁이 고개를 넘어가면 도로가에 몇 대의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난다.

이 공간 뒤편 야산 방향으로 무덤 한기와 더불어 거대한 백송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곳 무덤이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고조부가 되는 영의정 "김흥경" 의 묘소이라고 한다.

 

 <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고조부 영의정 "김흥경" 묘소 >

 

돌계단 따라 올라가면 먼저 백송나무를 대면하는데, 이 백송은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로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된 백송은 우리나라에 몇 그루 밖에 없는 희귀한 수종이라고 한다.

  

< 고조부 묘소 앞 수령 200년의 "백송" > 

 

이 백송나무는 추사 선생님이 25세 때, 자제군관(子第軍官) 자격으로 생부 김노경 따라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어 자란 나무이라고 한다.      

원래 밑에서 부터 3개의 가지가 나누어져 자라다가 2개의 가지는 고사(枯死)하고, 현재는 한개의 가지만 외롭게 자라고 있으며 수령이 약 200년이 되면서 나무의 높이가 약 10m가 된다고 한다.

 

<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백송" >

 

< "고사한 나무가지" 의 확대 모습 >          

 

정말 고고한 자태를 가진 백송을 구경하여 보면 일반적으로 어린 백송은 줄기가 다소 붉은 색을 띄고 있다가 수십년 연륜(年輪)을 가지면서 부터 차츰차츰 줄기와 나무가지 까지 흰색으로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곳 추사고택이 보유하고 있는 백송은 우리가 정말 대면하기 어려운 흰색의 소나무가 된다.

이렇게 추사 선생님에 대한 뿌리와 그의 업적을 기리도록 많은 유적과 유물 및 자료를 발굴 조사하고, 또한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한 후손과 예산군에 대한 고마움 마음을 간직하면서 집으로 향하는 여정이 됭다. -종합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