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생가 방문.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마을에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 및 "청계서원" 찾아보면서.

용암2000 2016. 10. 4. 19:54

2016년 9월 20일.(화요일)

 

* 서론.

옥전서원을 떠나면서 대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중에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생가 및 청계서원(淸溪書院)을 돌아보기 위하여, 지방도로 907번을 이용하여 고령군 방향으로 달려간다.

하신3거리에서 다른 지방도로가 되는 1034번을 이용하여 합천시가지 방향으로 조금 달려가면 황강을 넘어가는 내천교를 건너자 마자 왼편으로 내천마을을 만나는데, 마을 입구에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와 더불어 청계서원이 있다는 이정표가 방문객 시선을 집중하게 한다.

 

<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 및 청계서원" 을 알리는 이정표 >

 

1.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 관람. 

다소 넓은 마을 안길 따라 한 100m 정도 들어가면 도로변에 "전두환 전 대통령(全斗煥 前 大統領)" 의 생가(生家)를 알리는 안내문이 자리하고 있어 도로 가장자리에 주차하고, 먼저 안내문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읽어보기로 한다.

 

<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 앞에 있는 대문 및 안내문 >

 

< "안내문" 에 기록하고 있는 세부적인 내용 >

 

전 대통령은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263번지에 있는 이 가옥에서 태어난 곳인데, 전 대통령은 완산(完山) 전씨의 부친 "전상우" 씨와 광산(光山) 김씨의 모친 "김정분" 슬하의 7남매 가운데 1931년 1월 18일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전 대통령이 8세가 되는 1939년에 아버지가 일제의 순경을 폭행하면서 언덕으로 밀어 낙상시키므로, 만주로 야간 도주하여 그곳에서 약 2년간 살다가 몰래 대구로 돌아와 정착한 전 대통령은 빈한(貧寒)한 가정 형편 때문에 초, 중, 고등학교 전 과정을 고학으로 공부를 하게 만든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당의 남침으로 치열하게 전쟁이 벌어지는 1951년 12월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55년 정규 4년제 사관학교를 졸업 함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이 되고, 이후에는 유능하고 장래가 총망되는 청년 장교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우리나라 장교로는 처음으로 1959년에서 1960년 까지 2년 동안 미국의 특수전 및 심리전 교육과정을 이수하였으며, 원대 복귀한 뒤에는 공수특수부대의 대대장, 여단장 등 지휘관을 차례로 역임하였다고 한다.

1968년 1.21 사태 때에는 청와대의 외곽경비를 맡고 있는 수도 경비사령부의 대대장으로 있으면서 사전에 치밀한 대비 태세를 갖춤으로써, 북한 특공대의 기습을 효과적으로 격퇴하는 공로를 세웠다.

1973년 동기생 가운데 맨 처음으로 장군이 되어진 전두환은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로 근무하다 1978년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1사단장으로 부임하였는데, 이 시절 북한이 휴전선 이남으로 침투하여 오는 길목이 되는 제3 땅굴을 발견했다.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해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마자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맡게 되었는데, 그 수사과정에서 12. 12 사태가 빚어졌다.

1980년 중앙정보부장 서리와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서 10. 26 사건을 전후하여 조성된 국가의 총체적 위기를 수습하는데 지도적 역량을 발휘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제11대 대통령으로 추대 되고, 이어 새로운 헌법에 따라 1981년 3월 제12대 체육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취임한다.

전 대통령은 7년간 재임하면서 획기적인 물가 안전과 사상 최초의 국제수지 흑자 전환으로 경제도약의 토대를 쌓았고, 또한 아시안 게임과 함께 서울 울림픽대회를 유치하므로써 전방위 외교의 기반을 확충하고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남북자 가족 모임과 더불어 라이트 코리아 등 보수단체 회원은 서울 세종로 통일부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임진강 참사 사고 이후 1986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의 수공계획(水攻計劃)을 미리 간파하고 국민의 성금으로 "평화의 댐" 을 건설하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임기기간 동안 경제기획원이 관치를 펼쳐 전임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에 비해 임기동안 평균 물가 상승률을 6.1%으로 안정시킴과 동시에 과외금지 조치를 실시하므로, 서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였다. 

전 대통령은 대중적 인기를 만들면서 정치적 관심을 무마하기 위하여 지역별로 프로야구 및 축구팀을 만들면서 상호경쟁을 시키므로, 이를 통하여 한국에서는 1988년 하계 서울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계기와 더불어 스포츠 강대국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한다. 

아울러 전 대통령은 취임 때의 단임(單任) 실천 약속을 지켜 1988년 2월 퇴임하므로써 40년 헌장사에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물러난 최초의 대통령이 되지만, 퇴임하자 마자 정치적 공격을 받아 모두 4년 넘게 유폐 생활과 더불어 옥고를 치루었으나 평화적 정권 이양의 전통을 세워나가기 위한 진통으로 여겨 모든 어려움을 감내했다.

반대로 전 대통령은 군부의 하나회를 통하여 유혈사태를 만들면서 정권을 탈치하였는데, 국가안전기획부와 경찰청 대공분실 및 보안사를 통하여 인권유린과 더불어 친인척 비리, 삼청교육대. 방송국 및 언론인 장악, 국제그룹의 해체, 낮은 GNP에도 불구하고 스포츠 활성화, 재벌로 부터 강압적으로 탈치한 재산을 은익하여 추진금 납부를 거부하는 등 많은 비열 함이 묻어나는 전 대통령이라 하겠다.

어찌하던 합천군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이 태어난 이곳을 문화유산으로 길이 보존하기 위하여 1983년 대지 면적 약 190평에 목조 초가 4동으로 총 16평(안채 : 11평, 헛간 : 2평, 곳간 : 1.5평, 대문채 : 1.5평)의 건물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안내문을 읽고 나서 생가의 왼편 모서리에 있는 매우 작은 대문채에 딸려있는 대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 보기로 하는데, 다소 넓은 마당의 가장자리에는 초가 3칸의 안채가 자리하고 있지만 너무나 오랜동안 돌봄이 없어서 그런지 지붕에 있는 볏짚이 내려 앉으면서 용마루에는 다소의 굴곡을 가지고 있다.

 

< 대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생가" 전경 >

 

< 지붕 부터 망가지고 있는 11평 짜리 "안채" >

 

안채 오른편 전면으로 몇 개의 장독이 놓여 있으며 이 장독 뒤편으로 매우 작은 곳간이 자리하고 있고 마당의 전면 제일 오른쪽 구석에도 매우 작은 헛간 한채가 외롭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전 대통령의 생가 전체의 모습인데, 얼마나 가난하였으면 모든 것 전부가 작은 것 뿐이다.

 

< 안채의 오른편에 있는 1.5평 짜리 "곳간" >

 

< 마당의 전면 오른편 구석에 있는 2평 짜리 "헛간" > 

 

다른 대통령의 생가에는 그래도 넓은 집과 더불어 방의 내부 또는 대청 마루에 액자 한장 또는 책 한권이라도 놓아 두면서 그분의 업적을 자랑하고 있는데, 아무리 전 대통령이 잘못되게 정권을 잡았던 사람이라 하여도 그렇지만 한나라의 대통령으로써 국가의 대표가 되어 세계적 통치자와 함께 어깨를 나란하게 하면서 업무를 수행한 전직 대통령의 생가가 이렇게 방치하여도 되는지 의문을 가져본다.

밖으나 나와 먼 거리에서 전 대통령 생가를 다시 바라보니 생가가 마을의 중앙 전면에 자리하면서 도로변 따라 쌓여져 있는 기나긴 돌담 넘어로 한그루의 감나무가 높이를 자랑하고 있고, 생가의 뒤편으로 울창한 대나무 숲을 형성하고 있어 이렇게 하여 대통령을 배출하게 하는 길지의 생가 터인가 보다. 

마을의 모양세를 검토하여 보면 마을 밖으로 통과하는 1034번 지방도로 건너편에는 넓은 농경지를 이루고 있으면서 그 농경지의 끝지점에는 하회마을과 같이 강물이 회돌이를 하면서 흐르는 황강(黃江)과 더불어 황강 건너편 야산에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 적벽과 같이 석벽(石壁)을 형성하고 있어, 정말 범상치 않은 마을이라는 것을 풍수(風水)에서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쉽게 이해가 가리라.

 

< 풍수학적으로 길지를 형성하고 있는 "내천마을" 전경 > 

  

2. 청계서원의 방문

전 대통령 생가에서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면 마을의 끝지점 인접지역에서 앞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나타나는데, 이 도로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내천리 마을 앞에 조성하고 있는 농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아담한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 "청계서원" 앞에 있는 작은 저수지 >

 

이 저수지를 빙돌아서 야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면 왼편으로 잘 만들어져 있는 몇 기의 무덤을 지나면 청계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지만, 입구에는 주차장을 비롯하여 어떠한 안내도가 없으므로 도로 끝까지 올라가는 것이 거의 상식이 된다.

나도 도로 끝지점에 있는 분화구 주차장 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주변을 유심히 살피면서 운전하는 과정에서 울창한 숲속에서 한마리의 개가 짖은 소리가 들려 도로 가장자리에 승용차를 주차시키고 내부로 올라가는데, 오른편으로 개가 짖는 관리사 집을 먼저 만나고 아울러 바른편으로 청계서원의 대문이 높게 보인다.

 

< 청계서원 입구 오른편에 있는 "관리사" 가옥 >

   

일반적으로 서원은 야산의 기슭에 자리하면서 성현의 위패(位牌)를 배향하는 사람과 더불어 공부하는 학생의 출입이 완만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청계서원은 민가와는 너무나 떨어져 있는 산의 중터에 자리하고 있어 매우 이색적인 장소의 서원이라 하겠다.

 

< 야산의 중터 울창한 나무에 묻혀 있는 "청계서원" > 

    

대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입구 오른편에는 작은 우물 한기가 자리하고 있으며 왼편으로 매우 작은 글씨의 안내문이 붙어 있으므로 눈을 크게 뜨고 안내문을 정독하여 보기로 한다.

 

< 청계서원으로 들어가는 "대문" >

 

< 대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오른편 아래에 있는 "우물" >

 

< 돌계단 왼편 몇 배로 확대하면서 촬영하여 보는 "안내문" >

 

이곳 "청계서원(淸溪書院)" 은 조선 명종 19년(1564년)에 유학자 황강 "이희안(李希顔)" 선생님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고, 그 후 1592년 임진왜란 때 합천군에서 크게 공을 세운 "전치원(全致遠) 및 이대기(李大期)" 의병장의 위패를 숙종 28년(1792년)에 함께 배향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희안은 합천 초계 출신으로 10세 때 능히 글을 작성할 줄 알았는데, 중종 12년(1517)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38년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그뒤 명종 9년(1554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령 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곧 사직하였으며 그 뒤 군자감 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남명 조식(曺植선생님과 교유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전치원 선생님도 이곳 합천군 초계 출신으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6세의 나이로 스승 이희안의 손자인 이대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을 건너는 왜군을 저지하면서 곽재우 장군과 연합하여 현풍 및 창령 등에서 적을 공격하였으며, 이 공로로 사근찰방(沙斤察訪)으로 제수 받았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서원을 돌아보기 위하여 가파른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매우 작은 형태의 대문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다른 서원과 달리 대문이 활짝 열려있어, 관리사의 허가도 없이 서원의 내부 출입이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옛날에는 이곳 청계서원도 일반적인 서원 형식과 같이 마당의 좌우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傳) 하나 현재는 방금 통과한 작은 대문과 더불어 청계서원 건물만 남아 있는데, 넓은 마당을 지나면서 일단의 축대 위에 동향(東向)의 청계서원 본당이 자리하고 있다.

 

< 동쪽 방향으로 건축되어진 "청계서원 본당" >

 

청계서원 본당 건물은 정면 5칸 및 측면 2칸 크기에 앞뒤 툇간이 있고, 들보 3량(樑)으로 조성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건물의 형태는 가운데 2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한개의 방과 우측으로 2개의 방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뒤 튓간은 좌측 방 뒤에만 있다.

아울러 좌측의 방 앞에 있는 정면 튓간에는 대청보다 상당히 높은 누마루를 두고 풍혈(風穴)이 있는 평난간으로 막았으며, 또한 대청 상부는 퇴보를 쓰지 않고 긴 대들보와 바깥 기둥을 한데 묶어 짰으며 사다리꼴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지지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상과 같이 대문과 본당만 있는 매우 단촐한 청계서원을 관람하고 도로변에 세워두고 있는 승용차 방향으로 내려가니, 관리사 건물에 있는 개가 다시 사납게 짖으므로 개의 목소리가 적막한 산 속에 메아리가 되어 살아진다.

다시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 앞으로 지나가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포함하여 어린이들과 함께 대가족을 형성하고 있는 젊은 부부가 생가를 방문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보인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