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군.(가야산)

해인사 주변에 있는 16 암자 중 비구니 스님 수행처가 되는 "보현암" 을 포함한 5개 암자 탐방.

용암2000 2017. 7. 21. 21:48

2017년 7월 18일.(화요일) 

 

1. 3차 해인사의 산내암자 탐방.

오늘은 해인사 주변에 있는 산내 16 암자 중 1차(6월 12일)로 탐방한 6개 암자 및 2차(7월 13일)로 탐방한 5개 암자를 돌아보고 나서 나머지 5개 암자를 탐방하기 위하여 길을 나서는데, 금일은 지나가는 소낙비로 인하여 잔뜩 흐린 날씨가 되어진다.

전번과 동일하게 매표소를 지나 해인사 성보박물관 앞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나서, 오늘 첫 탐방 암자는 주차장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보현암과 금강암은 걸어서 탐방하고 나서 나머지 3개의 암자는 승용차를 이용하여 탐방하기로 한다. 

 

2. 보현암(普賢庵) 탐방.

해인사 성보박물관을 지나 홍류동 계곡으로 들어가면 계곡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물소리로 인하여 모든 시름을 잊어버리면서 다소 오르막 길 따라 해인사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왼편으로 가는 3거리 길을 만나면서 이내 홍류동 계곡을 건너는 향상교(向上橋) 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간다.

 

                       < 보현암 및 금강굴로 들어가는 "향상교" >

 

다리를 건나자 마자 길은 양쪽으로 나누어 지면서 2개의 이정표가 놓여 있으며 우측 방향으로는 삼선암 및 금선암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는 보현암 및 금강굴로 가는 이정표가 붙어 있는데, 이정표 밑에 금감굴은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동굴이 아니고 암자이라는 뜻으로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 "보현암과 금강굴" 을 알리는 이정표 >

 

오르막 길 따라 한 200m 정도 올라가면 넓은 텃밭과 더불어 오묵한 산자락을 형성하고 있는 평지 위로 다수의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초입의 전각들은 보현암이 되어지고 그 옆으로 일렬로 배치하고 있는 전각들은 금강암이 되어진다.

텃밭에서 채소를 수확하고 있는 한 비구니 스님에게 금강굴에 성철스님의 여식이 되는 불필(不必)스님이 살고 있는지를 물어보니 아직도 잘 계신다고 하면서, 방문하여 찾아보라고 한다.

나의 목적은 불필스님의 만남이 아니고 해인사 산내암자 탐방이 목적이므로 인하여 먼저 보현암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는데, 입구에는 "보현암(普賢庵)" 이라는 입석과 더불어 한편의 시(詩)를 새긴 입석이 별도로 놓여있다. 

 

                   < "보현암" 을 알리는 입석 >

 

                < 보현암 입석 뒤편에 있는 "한시" >

 

경내로 올라가면 입구에 심검당(尋劍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심검당 건물 기둥에 있는 모든 주련(柱聯)들이 한글로 되어 있어 대충 한번 읽어보고 나서 암자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 한글 주련이 붙어있는 "심검당" >

 

암자는 다소 넓은 마당을 하고 있으면서 일단의 축대 위로 보현암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에 요사채 건물을 거닐고 있고, 마당의 중앙에는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5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 5층석탑과 함께 하는 "보현암" >

 

                    < 보현암 왼편에 있는 "요사채" 건물 >

 

                 < 보현암 오른편에 있는 "요사채" 건물 >

 

            < 보현암 앞 마당에 있는 "연못" >

 

이곳 보현암은 1973년 "혜춘스님" 의 원력으로 세운 비구니 수행처로써, 요사채 건물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과 더불어 홍류동 계곡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승지에 자리하고 있다.

 

           < 보현암 마당에서 바라보는 "남산제일봉" >

                 < 보현암 마당에서 내려보는 "홍류동" 계곡 >

 

요사채 건물 뒤편으로 돌아서 가면 높은 계단 위에 대웅전(大雄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다소의 발품을 팔아 대웅전 건물로 올라가 부처님에게 간단하게 목례로 인사를 올리고 나서 보현암을 떠날려고 하니 곳곳에서 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활동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보현암 뒤편에 있는 "대웅전" >

 

                   < 대웅전 내에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불" >

 

3. 금강굴(金鋼窟) 탐방.

보현암 앞으로 이어지는 도로 따라 조금 걸어서 내부로 들어가면 보현암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금강암(金鋼庵)이 자리하고 있는데, 금강암은 입구에서 "금강굴(金鋼窟)" 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과 같이 동굴이 아니고 암자이다.

 

             < 보현암과 함께 하는 "금강굴" >

 

이곳 금강굴도 보현암과 유사하게 1976년 창건한 비구니 스님의 수행처로써 원래 이곳의 지명이 오가리(五佳里) 이라고 하였는데, 오가리는 다섯가지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뜻 이라고도 한다. 

다섯가지 아름다움 이라는 것은 산의 좌측편으로 펼쳐지는 가야산에 있는 좌청룡, 산의 우측편으로 펼쳐지는 남산제일봉에 있는 우백호, 눈 앞으로 펼쳐지는 홍류동 전망, 문수보살의 정진, 보현보살의 교화 등 다섯가지를 말한다고 한다.

경내로 들어가면 입구에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 암자의 중심 지점에 본찰이 되어지는 "금강보전(金鋼寶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금강보전 건물 앞에는 2그루의 백송이 성장하여 다소 흰색을 나타내고 있다.

 

           < 제일 먼저 만나는 "요사채" 건물 >

 

             < 요사채 건물 옆에 있는 "금강보전" >

                < 금강보전 건물 앞에 있는 "백송" >

 

금강보전 건물 내부에는 아담한 기도처와 함께 전면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고, 왼편으로 성철스님의 사진이 함께 하고 있어 여기가 성철스님의 딸이 되는 불필스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것을 무언으로 말하는 것 같다.

 

          < 법당 내 성철스님 사진과 함께 하는 "부처" >
 

이곳 금감굴 마당에서 왼편의 가야산 방행으로 바라보면 산의 7-8부 능선에 백련암이 자리하고 있는데, 금강굴에서 상주하는 불필스님은 살아생전 매일 성철스님의 먼 그림자를 보다가 성철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법당에 모시고 있는 사진으로 매일 대면하고 있는 것 같다.

 

           < 왼편 가야산 방향에 있는 "백련암" 전경 >

 

불필스님은 성철스님이 출가를 하신 후에 태어난 딸이다 보니 "필요 없는 딸" 이라는 뜻을 가진 불필(不必) 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딸이 아버지에게 법명을 받는날 "하필이면 왜 불필" 이라고 하는가를 물어보니 "하필(何必)을 알면 불필의 의미를 알게 될 것"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금강보전 건물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스님들의 수행처가 되어지면서 출입을 금지하는 안내문과 함께 "문수원(文殊院)" 이라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금강굴은 보현암과 대조적으로 너무나 조용하면서 적막감이 흐르고 있어 한명의 스님도 만날 수 없어 불필스님의 의문점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금강굴을 떠나기로 한다. 

 

                  < 금강보전 왼편에 있는 "문수원" >

             < "보현암과 금강굴" 이 일렬로 함께 하는 전경 >

 

                < 금강굴 마당에서 바라보는 "홍류동" 계곡 >
 

4. 고불암(古佛庵) 탐방.

고불암(古佛庵)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승용차를 몰고 치인마을에 있는 해인초등학교 방향으로 올라가서, 직진의 계곡 방향으로 약 3Km 정도 올라가면 해발 800m 정도에 치인 2동 마장동 마을에 도착 되어진다. 

마장동 마을에는 더 넓은 평원으로 형성하므로 인하여 고랭지 채소를 키우는 밭과 더불어 해인사에서 운영하는 고불암 주조원 및 노인들의 요양원이 되어지는 자비원 건물이 야산의 가장자리 따라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 해발 800m 정도에서 넓은 평원과 함께 하는 "자비원" >

 

2개의 건물 사이로 이어지는 도로 따라 야산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해발 약 900m 정도에 고불암이 자리하고 있는데, 고불암은 가야산 자락의 해인사 부지 내에 있는 암자 중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암자이다. 

 

        < "고불암" 을 알리는 입석 >

 

              < "고불암" 의 조감도 >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하고 나서 주차장 주변을 돌아보면 소나무 숲 단지 속에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는 돌탑 군락지가 만들어져 있는데, 주변으로 산책하면서 여가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의 장소가 되어진다.

 

            < 주차장 인접지역에 있는 "돌탑 군락지" >

                              < 울창한 숲과 함께 하는 "삼천불탑" >

 

                           < 정교하게 쌓은 "돌탑" >

 

고불암을 알리는 이정표 따라 경내로 들어가면 먼저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목조건물로 되어진 고불 전통찻집이 자리하고 있는데, 몇명의 관광객들이 테라스에 설치한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나 목가적이다.

 

         < 고불암 입구에 있는 "고불 전통찻집" >

 

연못을 지나 왼편으로 들어가면 넓은 잔디광장과 더불어 2채의 건물 사이로 고불암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좌측의 용선당(龍船堂) 건물에는 불자를 위한 공양간 건물이 되어지고 오른편 반야당(般若堂) 건물에는 종무소로 활용하고 있다.

 

          < "고불암" 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 >

 

          < 좌측에 있는 "용선당" 건물 >

 

              < 우측에 있는 "반야당" 건물 >

 

고불암의 건축 불사는 10명의 독지가들이 약 1년간 걸쳐 한국의 유명한 사찰의 가람을 두루 섭렵한 후 이를 참고 하여, 부지 약 1만평에 건평 725평으로 2003년 7월에 토목 기초공사를 시작하여 2004년 3월 부터 본격적으로 건물을 지어 2004년 10월에 완공하였다.

고불암이 완공되자 마자 해인사에서 공찰로 운영하도록 기부하여 해인사의 재산으로 등록하였는데, 사찰은 전통 목조식 건축물과 현대식 건축물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찰이라 하겠다.

양쪽 건물의 중앙 통로를 통과하면서 앞으로 전진하여 나가면 높은 돌계단 위에 "고불루(古佛樓)" 이라는 루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루각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높이가 작난이 아니라 한 걸음으로 올라가기에 너무나 부적합한 높이의 계단이 되어진다.

 

            < 높은 돌계단을 가지고 있는 "고불루" >

 

억지로 계단을 올라서면 넓은 마당과 함께 좌우로 웅장한 2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좌측의 건물에는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하는 벽안당(碧眼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편의 육화당(六和堂) 건물에는 주지실로 사용하고 있다.

 

             < 좌측에 있는 "벽안당" 건물 >

 

                 < 우측에 있는 "육화당" 건물 >

 

다시 높은 돌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가면 고불암에서 주불은 모시고 있는 대웅보전(大雄寶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 내에는 독특하게 청동으로 만든 관음좌상 한분을 모시고 있는 불당이 되어진다.  

 

                    < 고불암 제일 상단에 있는 "대웅보전" >

 

          < 대웅보전 내에 모시고 있는 "관음좌상" >

 

이렇게 방대한 고불암 건물과 더불어 주변의 경관에 도취하면서 산책 하다가 고불암의 오른편 야산 방향으로 "무량수전(無量壽殿)" 이라는 건물이 있다는 안내문 따라 관람하여 보기로 하는데, 무량수전은 고불암에서 약 400m 정도의 야산 넘어 있다고 표시하고 있다. 

 

               < 대웅보전 앞에서 내려보는 "고불암" 전경 >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나 먼거리가 되어지므로 인하여 주차장으로 내려와 승용차를 이용하여 야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길의 중간지점에 아취형 해탈문과 더불어 2층의 종루 건물을 만나는데, 종루에는 한글로 "고불암종루극락문"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무량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해탈문" >

 

해탈문을 지나 야산을 조금 돌아서 가면 무량수전 이라는 입간판과 더불어 거대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에는 최신식 납골당으로 운영하고 있으면서 납골당 건물이 너무나 방대하면서 웅장하여 기세에 눌려 내부 관람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구에서 돌아 가기로 한다.

 

                        < 납골당이 되는 "무량수전" 건물 >

 

                        < 무량수전 앞에 있는 "수목장" 전경 >

 

5. 고운암(孤雲庵) 탐방.

좁은 길 따라 승용차를 몰고 치인마을로 내려와서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속담과 같이 매우 늦은 점심식사 시간을 가지고 나서, 해인초등학교 방향으로 다시 올라가면서 직진의 고불암 방향에서 90도 방향으로 꺽어서 초등학교 정문 방향으로 올라간다.

 

            < 해인초등학교 앞으로 가르키는 "고운암" 이정표 >

 

해인초등학교 정문 입구에서 또 다시 90도로 꺽어서 고불암을 가르키는 방향과 더불어 학교 운동장을 구획하고 있는 담장 따라 올라가면 좁은 계곡 사이로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의 마을은 치인마을의 본래가 되어지는 원치인마을이라고 한다.

 

               < 해인초등학교 정문과 함께 하는 "고운암" 가는 길 >

 

거의 차량의 교행이 불가능 할 정도의 좁은 도로 따라 한 1Km 정도 올라가면 야산의 제일 끝지점 해발 800m 언저리에 아담한 연못을 품고 있는 한채의 전각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 건물이 "고운암(孤雲庵)" 이라고 한다.

 

                    < 해발 800m 정도에 있는 "고운암" >

           < 법당 처마에 있는 "현판" >

              < 고운암 앞에 있는 "연못" 과 가야산 전경 >

 

건물 주변에는 별도의 주차장이 없어 도로 가장자리에 임의로 주차를 시키고 나서 법당을 돌아보기로 하는데, 법당을 돌아보기 전 도로 건너편 야산 방향으로 한기의 비석이 있어 건너가 보기로 한다.

비석 전면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님이 기거한 초막(草幕) 이라는 집이 이곳에 숨어 있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고운선생 구저은일지지(孤雲先生 構邸隱逸之地)" 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 한기가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방치되어 있다.

 

             < 야산 언저리 "최치원의 초막" 을 새긴 비석 >

 

최치원 선생님은 신라의 문신이면서 불교와 유교 및 도교에 이르기 까지 종교적 이해가 매우 깊었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로써, 신라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려 6두품에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湌)을 받은 점 등을 미루어 보아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학자이다.

경문왕 8년(868년)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서 7년 만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다가 29살(885년)이 되어지는 해에 신라로 돌아와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翰)에 임명되어 지는데,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 받았으나 골품제의 한계로 인하여 야망의 뜻을 크게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산과 강 및 바다를 두로 유람을 하면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말년에는 해인사로 들어와서 후학의 양성과 더불어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는데, 해인사 주변으로 최치원 선생님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다시 전각 방향으로 올라가면 1974년에 이곳에 있었던 초막의 집을 새롭게 법당으로 개조하면서 법당의 이름을 최치원 선생님의 호를 따서 고운암이라고 하였고, 그 옆으로 가정집 같은 관리사 건물 한채가 고운암의 전각 전체가 되어진다.

 

               < 고운암 오른편 옆에 있는 "관리사" >

 

법당 내에는 잘 정돈이 되어 있으면서 전면에 매우 작은 3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고, 좌측 벽면에는 고운 선생님의 사진과 함께 방의 바닥에는 누군가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작은 책상이 놓여있다.

 

                < 법당 내에 모시고 있는 "부처" >

 

                         < 법당 내 왼편 벽면의 "최치원" 사진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책상 >

 

이곳 고운암에도 찾아오는 관광객이나 불자와 더불어 경내를 관리하는 스님 한명도 보이지가 않으면서 적막감이 흐르고 있어, 조용히 법당을 나와 고운암을 떠나기로 하면서 승용차에 오른다.           

 

6. 청량사(淸凉寺) 탐방.

고운암에서 승용차를 이용하여 홍류동 계곡의 거의 끝지점 까지 내려오면 청량사로 올라간다는 이정표을 만나는데, 청량사로 올라가는 길은 홍류동 계곡을 건나자 마자 급경사의 산기슭 따라 만들어진 도로를 이용하여 한참 올라가면 마을과 더불어 저수지를 만난다.

저수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입장료와 주차비는 이미 해인사 탐방 때 지불하므로 인하여 영수증의 제시로 대신하면서 급경사의 도로 따라 한참 올라가면 청량사 경내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 되어진다.

 

            < 천불산 "청량사" 를 알리는 입석 >

 

청량사(淸凉寺)는 해인사 홈 페이지에서 암자로 등록이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寺)는 독립 또는 말사로 표기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청량암(淸凉庵)으로 표기하지 않고 청량사(寺)를 표기하므로 인하여 다소 혼돈이 발생하게 한다. 

청량사는 창건 연대가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말의 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이곳에서 놀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청량사가 오랜 동안 폐사가 되어 방치한 것을 1811년에 회은스님이 중수하였고 최근에 이르러 경암스님이 다시 중건하였는데, 지금 또 다시 큰 불사를 일으켜 새롭게 단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량사가 자리하고 있는 산의 본래 이름은 천불산(千佛山 : 해발 1010m) 이었지만 현재는 남산제일봉(南山第一峰) 또는 매화산(梅花山) 이라고 불려지는데, 천불산은 기암괴석의 산세로 인하여 가야산 보다 많은 등산객들이 움직이고 있는 산이다.

 

                      < 기암괴석의 천불산을 배경으로 건립되어진 "청량사" 전경 >


경내로 들어가는 오르막 길 오른편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먼저 2층의 루각 건물을 만나는데, 루각 처마에는 "설영루(雪影樓)" 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면서 1층 돌기둥 사이로 통과하여 경내로 올라서면 넓은 마당과 함께 좌우에 신도들이 사용하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주차장에서 "경내" 로 들어가는 입구 >

 

           < 청량사로 들어가는 "설영루" >

 

왼편에 있는 상락당(常樂堂) 이라는 건물에는 신도들의 숙박 시설과 더불어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 되어지고, 오른편에 있는 적연당(寂然堂) 이라는 건물에는 신도들의 수행처가 되는 건물이라 한다.

 

           < 경내의 왼편에 있는 "상락당" 건물 >

               < 경내의 오른편에 있는 "적연당" 건물 >

 

마당 전면에 있는 높은 축대 위로 3층석탑의 상부 및 대웅전 지붕 일부분이 보이고 있는데, 바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으면서 축대의 허리 쯤에서 왼편으로 돌아서 가는 오솔길이 만들어져 있어 길 따라 올라가면 대웅전 마당에 도착이 된다.

 

            < 암자 제일 상단에 있는 "대웅전" >

 

넓은 마당에는 대웅전 건물을 중심으로 전면으로 보물 제253호가 되어지는 석탑과 보물 제265호가 되어지는 3층석탑이 일렬로 배치가 되어져 있고, 대웅전 건물의 왼편에는 약광전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대웅전 앞 일렬로 배열하고 있는 "석등과 3층석탑" >

              < 대웅전 왼편에 있는 "약광전" >

           <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요사채" 건물 >

 

대웅전 건물을 먼저 관람하여 보기로 하는데, 대웅전 건물 내에는 다른 사찰과 상이하게 불상의 높이가 2.1m 이고 대좌 높이가 75Cm가 되어지는 보물 제265호가 되는 "석조석가 여래좌상(石造釋迦 如來坐像)" 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조석가 여래좌상은 삼단의 4각형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에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자세로 앉아 있는데, 착의로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이 되며 또한 부처의 나발 머리에는 육계가 뚜렷하고 단아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 불상이라 한다.

또한 불꽃 문양의 광배 꼭대기에는 화불이 모셔져 있으며 양쪽에 구름을 타고 날으는 두쌍의 비천상이 역동적으로 묘사되고, 하단이 되는 기단석에는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는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신라시대에도 차 문화가 발달 되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 대웅전 내에 모시고 있는 "석조석가 여래좌상" >

 

더불어 안정되고 조용한 신체 형태로 현실적 사실주의 양식을 하고 있으므로 인하여, 경주 석굴암 불상과 함께 불상양식 전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대웅전 앞으로 내려오면 보물 제253호로 지정이 되어지는 "석등(石燈)" 은 9세기를 대표 할 수작의 석등이 되어지며, 보물 제266호로 전체 높이 4.85m가 되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三層石搭)" 이 일렬로 배치하고 있다.

 

            < 대웅전 앞에 있는 "석등" >

            < 석등 앞에 있는 "삼층석탑" >

 

대웅전 왼편에 있는 약광전(藥光殿) 건물 내에는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지만, 이곳 청량사도 해인사의 아성으로 인하여 그렇게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지 않고 있어 적막감이 흐르는 암자이라 하겠다.

 

             < 약광전 내에 모시고 있는 "약사여래불" >

           < 대웅전 마당에서 내려보는 "설영루" >

 

나는 한 때 청량사 앞으로 만들어져 있는 산행길 따라 남산제일봉을 수 많이 산행을 하면서 그 때 마다 건성으로 청량사를 방문한 경험이 있지만, 오늘은 탐방을 목적으로 가야산이 품고 있는 암자를 방문하므로 새롭게 불 수 있는 안목을 가지는 탐방이라 하겠다. 

 

                    < 해인사 주변으로 "24개 암자" 가 있다는 설명문 >

 

해인사 입구에 있는 안내문에 의하면 해인사 주변으로 24개의 암자가 산재하고 있다는 설명문이 붙어 있는데, 이번 암자를 방문하는 곳 마다 16개 암자 이외에 암자를 가르키는 입간판을 보고 시간이 허락하면 이들 암자도 탐방 할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자문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