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문화와 산행.

백봉회 8월 산행은 경북 김천시 증산면에 있는 청암사 관람 및 '인현왕후길' 따라 걸어보면서.

용암2000 2020. 8. 10. 22:37

 

2020년 8월 9일.(일요일)

 

1. 산행의 개요.

백봉회 제338봉 산행이 매월 2번째 일요일에 실시하는 계획에 따라 8월 9일에 실시하겠다는 집행부 연락으로 산행에 동참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반대로 약 40여 일 간 기록적으로 강타하는 물 폭탄으로 매우 우려한 날짜가 지속된다.

금월 산행계획은 산행이라기 보다는 트레킹이 되는 김천시 증산면에 있는 '인현왕후길' 을 걷겠다는 집행부의 사전 통보에 따라, 나는 그곳 인현왕후길 코스는 나의 농원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심심하면 찾아가는 곳이라 너무나 익숙한 길이라 하겠다.

나는 산행의 전 날에도 계속하여 농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때 성주 및 김천 인근에 너무나 많은 비가 내려 다수의 산사태가 발생하고 있는 곳이 빈번하여 걱정을 하면서 대구로 돌아와 하루밤을 머물고 아침에 일어나니 천만 다행으로 비가 내리지 않아 주어진 시간에 만남의 장소로 나가본다.

이렇게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산행을 동참하겠다는 배짱을 가진 7명의 동문과 평소에도 가끔씩 우리 백봉회의 꽃이 되어지면서 산행을 동참하여 주는 6분의 여성들이 동행하는데, 비록 작은 인원이지만 그래도 어떠한 역경에도 산행을 추진하고자 하는 동문의 마음이 아름답다 하겠다.

마이크로 버스는 산행 들머리가 되는 김천시로 들어가기 전 성주를 통과하는데, 그렇게도 많이 지나갔던 성주대교 아래에 너무나 많은 물이 흐르고 있어 지금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안동댐 및 임하댐에서 수문을 열어 물을 방류한다는 물 폭탄 뉴스가 실감나게 만든다.

 

2. 청암사의 관람.

곳곳에 흐르고 있는 물 폭탄을 구경하면서 약 2시간 정도 운전하여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인현왕후가 3년간 머물었던 청암사 경내를 먼저 구경하기로 하는데, 청암사 입구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니 잠깐 사이에 내리지 않은 비로 인하여 다수의 사진작가들이 폭포의 물을 촬영하기 위하여 많은 승용차를 운전하여 왔나 보다.

나는 이곳 청암사를 자주 방문하여 블로그에 몇 번이나 소개하므로 이번에도 간단하게 청암사를 기술하여 보기로 하는데, 청암사는 김천시 증산면에 있는 해발 1317m '수도산(修道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수도산은 가야산과 함께 맥(脈)을 같이 하는 산이라 우리나라에서 불교의 성지가 되므로 수도산의 옛 이름이 불영산이라고 불려졌는데, 그래서 일주문에는 불영산청암사(佛靈山靑巖寺)이라는 현판에 붙어있다.

 

< 청암사의 첫 관문이 되는 '일주문' >

 

일주문 앞에서 2개의 길로 나누어지면서 왼편으로는 차량이 다니는 길이 되어지고 일주문을 바로 통과하여 올라가면 천왕문(天王門)을 만나는데, 천왕문 내에는 사천왕 불상은 없고 벽면에 그림으로 대신하고 있다.

천왕문 오른편 축대 위로 2채의 비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한 채의 비각 건물에는 '회당비각(晦堂碑閣)'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옆에 있는 비각 건물에는 '대운당비각(大雲堂碑閣)'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청암사의 두번째 관문인 '천왕문 및 비각' 건물 >

 

천왕문을 통과하면서 부터 오솔길이 되어지는데, 오솔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청암사 앞으로 흘려 내리는 개울을 건너가기 위한 작은 다리를 만나면서 다리 주변으로 거대한 암벽(岩壁)을 형성하고 있다.

다리 입구에 있는 암벽 사이로 솟아나는 '우비천(牛鼻泉)' 이라는 옹달샘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옹달샘에서 상부 방향으로 바라보면 낙차가 큰 폭포가 숨어있는데, 폭포 주변으로 많은 사진작가들이 작품을 찍기 위하여 거대한 카메라에 눈을 고정하면서 폭포를 응시하고 있다.

 

< 옹달샘 앞에서 바라보는 숨은 '폭포' >

 

작은 다리를 건너자 마자 왼편으로 돌아서오는 차량 도로와 만남을 가지면서 청암사 경내에 도착하는데, 청암사는 경내 앞으로 흘려 내리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 개울 앞에는 범종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극락교 입구에 있는 '범종각' 건물 >

 

청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극락교(極樂橋)를 건너면 조그마한 광장을 만나면서 광장의 뒤편 가장자리에 샘과 함께 거목의 보리수 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는데, 보리수 나무에는 왕성한 성정을 하면서 많은 잎이 무성하지만 너무나 오랜 장마로 인하여 녹음의 진가를 발휘도 못하고 허무하게 서 있다.

 

< 청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극락교와 루각 건물' > 

 

광장의 좌측과 우측에 2층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좌측 루각 건물의 1층에는 종무소로 운영을 하고 있으며 2층에는 '정법루(正法樓)' 라는 현판과 더불어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고, 우측에 있는 2층 '중현당(重玄堂)' 이라는 요사채 건물이 적막감 속에 머물고 있다.

 

< 경내의 오른편에 있는 요사채 '중현당' >

 

샘의 옆으로 만들어져 있는 돌계단으로 올라서면 ㄱ자 형태의 '진영각(眞影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건물에도 적막감 속에 머물면서 마루에는 몇 명의 관광객이 여가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진영각 건물 왼편이면서 정법루 건물 뒤편이 되는 곳에 아담한 마당이 자리하면서 마당의 중앙에서 다소 오른편으로 치우친 다층석탑이 서 있고, 이단의 축대 위로 주불은 모시고 있는 '대웅전(大雄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작은 마당에 서 있는 '다층석탑' >

 

< 이단의 축대 위에 있는 '대웅전' >

 

이곳 정암사는 신라 헌안왕 2년(858년)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하였지만 조선 인조 25년(1647년) 화재로 전소(全燒)가 되었으나 벽암(碧巖) 및 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의 문도(門徒)가 되는 허정(虛靜)와 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는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하였다고 한다.

불당 내부에는 불공을 올리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많은 스님과 함께 신도들이 작은 경내에 머물고 있고 대웅전 좌측에는 비구니 스님을 양성하는 승가대학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청암사 승가대학은 벽암 및 각성의 강맥을 이어오는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스님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을 효시로 하고 그 이후 허정(虛靜) 및 혜원(慧遠) 스님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다.

1711년 경 조선시대 벽암 및 각성, 모운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당 정혜(定慧) 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발전시킨 스님으로써,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운집한 학생의 수가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수 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및 고산스님으로 이어지고, 현재 청암사 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 및 의진스님이 1987년 3월 청암사를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승격시켰다.

 

< 대웅전 왼편에 있는 '승가대학' >

 

다시 극락교를 건너 사찰의 전면 방향으로 올라가면 인현왕후가 기거하였다는 '극락전(極樂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정면 7칸에 측면 7칸의 규모에 2층 누대를 설치한 "ㄱ자" 형태의 복합 건물이면서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 사찰 입구 '극락전' 을 가르키는 이정표 >

 

정문이 되는 작은 문의 입구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으로 먼 발취에서 사진 한장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이곳에서 인현왕후가 3년 동안 기거하였다는 어떠한 안내문 한장도 없으므로 청암사는 인현왕후와 관계를 전연 표현하지 않고 오직 흘려가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두고 있다.

 

< 사대부 가정집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극락전' >

 

숙종의 정비(正妃)가 되는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 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이 되어 궁(宮)에서 벌목 장비 등을 하사 하었고 조선시대 말기 까지 궁중의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극락전 옆에 있는 서쪽 방향으로 돌아서 가면 또 다른 요사채 건물과 함께 '보광전(普光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작은 규모의 법당이 되어지지만 내부에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 상이 너무나 유명한 부처가 된다.

 

< 극락전 왼편에 있는 '보광전' >

 

< 보광전 내에 있는 '42수 관세음보살' >

 

보광전 앞으로 내려오면 입구에는 부도탑 군락지가 자리하고 있으면 그 앞으로 차량이 다니는 도로를 만나는데, 도로 가장자리에는 청암사에 유명한 2개의 해우소 건물이 나란하게 자리하면서 하나는 옛날 재래식 변소가 되고 나머지 하나는 현대 수세식 변소가 된다.

 

< 극락전 앞에 있는 '부도탑' >

 

부도탑의 건너편으로 백련암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옛날에는 이곳 백련암 옆으로 수도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산행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수도산의 8부 능선 정도에 청암사의 산내 암자가 되는 수도암(修道庵)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수도산 정상 또는 수도암으로 올라가는 길은 다른 능선의 계곡이 되면서 무흘구곡 중 7곡(만월당)와 8곡(와룡암) 및 9곡(용추폭포)이 있는 옥동천 따라 포장도로가 만들어져 있어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이동의 동선(動線을)이 바꾸어지는데, 옛날 발품을 팔면서 산행을 할 때에는 백련암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옛길이 오리지널 '인현왕후길' 이라 하겠다.

 

< 오리지널 '인현왕후길' 을 나타내는 현황판 >

 

3. 인현왕후길을 걸어면서.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시도하기 위하여 청암사 주차장을 떠난 마이크로 버스는 청암사 전면의 계곡이 되는 옥동천 따라 한 20여 분 정도 올라가면 수도암 입구에 있는 수도리 마을에 도착이 되는데, 이곳 수도리 마을이 '인현왕후길' 출발지점이 된다.

수도리 마을은 옛날에 매우 한가한 동네가 되었는데, 이제는 마을 입구에 다소 넓은 주차장과 함께 주차장 가장자리 따라 먹거리 촌을 형성하면서 다소 활기찬 마을로 탈바꿈하고 있어 많는 등산객 또는 트레킹 객들이 찾아오는 코스가 되어진다.

 

< 수도리 마을 입구에 있는 '주차장과 먹거리 촌' > 

 

마을 입구에는 인현왕후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곳곳에 붙어 있으면서 일행은 각자가 마실 막걸리 한병씩 분산하여 베낭에 넣고 트레킹의 들머리로 올라가는데, 트레킹 길은 수도암으로 올라가는 포장도로 따라 한 500m 까지 함께 걸어야 한다.

 

<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인현왕후길' 안내도 >

 

그렇게 많은 비가 내리는 날씨가 계속 되어지다가 우리 백봉회 산행을 시작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도움이 있는지 아니면 인형왕후의 후덕한 인심의 발로가 되는지, 그렇게도 찌뿌린 날씨가 햇빛이 나오면서 다소 쾌청한 날씨로 변모가 일어난다.

포장길 옆에는 100m 마다 거리를 안내하면서 인현왕후가 인사의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인사의 내용은 너무나 급경사의 길이라 수고가 많다는 이야기로 부터 도로 가장자리 옆으로 흐르고 있는 옥동천의 시원한 계곡에서 조금 머물었다가 가는 여유를 가지라고 조언하여 준다.

 

< '인현왕후' 가 이야기하여 주는 옥동천 >

 

< 100m 마다 걷는 방법을 가르켜 주는 '인현왕후' >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면서 500m 정도 올라가면 3거리가 나타나는데, 이곳 3거리에서 좌측으로는 국립김천치유의 숲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편으로는 수도암이 1Km 정도 더 가야한다는 입석이 서 있다.

 

< 약 500m 지점에서 만나는 3거리 '이정표' >

 

수도암 방향으로 10여 미터 정도 올라가면 또 다시 3거리를 만나면서 왼편으로는 수도암으로 올라가는 포장길이 되고, 오른편 비포장길이 인현왕후길이 되어진다고 하면서 쉼터가 되는 의자와 함께 인현왕후가 고운 옷을 입고 본인을 소개하고 있다.

 

< 인현왕후길 초입 '본인' 을 소개하고 있는 현황판 >

 

< '어제' 의 안내문 : 한번 보기 위하여 직지사를 찾았지만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어 실폐하여 반듯이 확인 후 방문 할 것 >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수차례 일어난 정변과 찬탈 등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정순왕후 송씨, 제헌왕후 윤씨, 단경왕후 신씨 등 몇몇 왕비들이 고귀한 국모(國母)의 지위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그 가운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었다가 생전에 복위한 유일한 왕비가 되어지는데, 그녀는 특히 경국지색의 장희빈과 얽힌 고달픈 사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궁중비사(宮中秘史)를 다루는 수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서인 명문가의 후예였던 그녀는 서인과 남인의 극단적인 대립정국을 환국정치로 돌파하려 했던 숙종과 그녀를 미혹하면서 천출(賤出)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장희빈 사이에서 천당과 지옥을 갔다 왔다한 여인이다.

그녀는 험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후덕한 성품으로 유교사회의 모럴이었던 ‘여필종부(女必從夫)’ 의 모범을 보였다 하여 당대는 물론이고, 사후까지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숙종은 1674년 8월 23일 14세의 나이로 조선의 19대 국왕이 되는데, 숙종은 집권 서인들이 현종왕 때 마무리 짓지 못한 예송논쟁을 재차 제기하자 송시열을 비롯하여 서인 일파를 조정에서 축출하고 허적과 윤휴 등 남인을 대거 기용한다.

그러나 숙종 6년(1680년) 3월 허견의 옥사에서 비롯된 경신환국으로 인하여 다시 서인이 등장하면서 허적과 윤휴를 비롯하여 수 많은 남인을 죽이거나 정계에서 축출당하게 만드는데, 이렇게 서인과 남인이 주고 받는 난투전에서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와 남인을 대표하는 장희빈의 전투에서 일단 장희빈이 승리를 거둔다,

그래서 인현왕후는 계비(繼妃)에서 폐위가 되어 5년 동안 친정으로 돌아갔었는데, 그 때 인현왕후 어머니의 친정이 경북 상주에 있으면서 친정이 이곳 청암사와 연(連)이 있어 그로 인하여 인현왕후는 청암사로 내려와 3년 동안 머물게 된다.

인현왕후는 이곳 청암사에 머물면서 기도발이 잘 듣기로 유명한 수도암 까지 수시로 왕래하면서 불공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 소원의 기도로 인하여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 동안 왕으로 역임하였던 영조의 어머니가 되는 최무수리의 기교로 경종의 어머니가 되는 장희빈을 몰아내고 다시 왕비로 복원이 되어진 역사적인 장소가 된다.

 

< 쉼터에서 내려보는 '수도리' 마을 전경 >

 

오늘 걷고자 하는 이곳 인현왕후길에는 김천 지방지치단체에서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 길로 만들었는데, 걷다가 심심하면서 다소 지쳐질려고 할 때 마다 7곳에 휴식처와 함께 스토리 글을 만들어져 있어 그 내용을 읽다 보면 한권의 소설책을 완파하게 만든다.

 

< 두번째 쉼터가 되는 '휴식처' >

 

< 두번째 쉼터에 있는 '스토리 텔링' > 

 

< '인현왕후' 가 시집가는 날 >

 

일행은 제1편의 스토리를 읽고 나서 다음의 코스로 이동을 하면서 걷는 길은 임도가 되어지면서 산의 허리로 만들어지므로 무아지경(無我之境)으로 걸을 수 있는데, 울창한 숲 사이로 이어지는 길이 힐링(Healing)을 느끼기에 충만하게 만든다.

 

< 임도를 활용하여 만든 '인현왕후길' >

 

어느 휴게소에서 집행부에서 준비한 대구에서 유명한 반고개 무침회와 함께 지참하고 있는 막걸리로 기나긴 여가의 시간을 가지는데, 오늘은 늙어가는 촌노(村老)에게 인현왕후와 같은 아름다운 색시들이 따라주는 막걸리 맛이 보약(補藥)이 되는지 잘도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간다.

 

< 막걸리 파티가 열리는 세번째 '쉼터' >

 

< 먹구름이 드리운다는 '인현왕후' 운명 이야기 >

 

< 계속하여 만나는 '쉼터' >

 

< 수도산 자락으로 내려온 '인현왕후' 이야기 >

 

< 인현왕후의 '소원' 을 비는 이야기 >

 

이렇게 부어라 마시라 걸어라 쉬어라 하면서 약 1시간 정도 걸어가면 마지막 스토리 텔링 글이 쓰여 있는 7번째 휴게소에 도착이 되는데,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자와 함께 하므로 또 다시 긴 휴식의 시간을 가진다.

 

< 갑자기 만들어진 '폭포' 도 지나고 >

 

< 정자와 함께 하는 마지막 '쉼터' >

 

<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는 '인현왕후' 의 이야기 >

 

< '가마' 를 타고 떠나는 인현왕후 >

 

여기에서 계속하여 임도의 길로 걸어가면 청암사로 내려가는 길이 되지만 그 방향으로 출입이 금지 된다는 현황판과 함께 오른편으로 인현왕후길을 가르키는 이정포가 자리하고 있는데, 지시하는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바로 원점회귀로 내려가는 길이 만들어져 있다.

 

< 왼편 임도로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이정표' >

 

< '오른편 길' 로 걷는 일행 >

 

< 곳곳에 만들어진 '포토죤' 도 지나고 >

 

이곳에서 부터 급경사의 내리막 길이 되어지므로 인하여 안전(安全)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다시 30분 정도 내려가면 급류가 흐르고 있는 작은 개울가에 도착하는데, 평상시에는 물이 흐르지 않은 건천(乾川)인 것 같지만 너무나 많은 폭우로 인하여 위험한 개울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 급경사 길로 내려가는 '일행' >

 

< 갑자기 내려오는 '개울' 물 >

 

어찌어찌 하면서 물을 건너 한 10분 정도 하산을 하면 아침에 수도리 마을로 올라가는 도로를 만나면서 인현왕후길은 용추교를 건너면서 도로 건너편 야산 기슭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다수의 인원은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하면서 머물겠다고 한다.

 

< 용추교 앞에 있는 '인현왕후길' 조감도 >

 

< 계곡을 건너게 만드는 '용추교' > 

 

그래서 몇 명의 동문과 여성분은 계속 산행의 길로 올라가지만 오솔길 바로 아래로 흘러 내리는 물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는데, 너무나 큰 물소리로 인하여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묵묵하게 걸어서 20분 정도 올라가면 인현왕후길에서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고 있는 '용추폭포' 에 도착이 된다.

 

< 거대한 물보라를 만들고 있는 '용추폭포' >

 

이곳 용추폭포는 조선시대 성주군이 배출한 한강 '정구(鄭逑)' 선생님은 조선 중종 38년(1543년)에 태어나 광해군 12년(1620년) 77세에 돌아가셨는데, 판서인 아버지 정사중(鄭思中)과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 태어나 성주에 정착하면서 살았다.

그는 외증조부인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의 도학을 전수하였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풍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는데,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여 부득이 관직에 나올 경우 주로 외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는데, 내직으로는 우승지,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으로 추증되는 역사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그는 이곳 대가천이 너무나 아름다워 중국 남송의 주자 '무의구곡' 을 모방하여 그의 대부분 삶을 보낸 100리 길 대가천을 거슬러 오르면서 풍광이 아름다운 아홉 곳의 명소를 골라 차례로 이름을 붙이고, '무흘구곡(武屹九曲)' 이라고 하였다.

이 무흘구곡 중에서 최고의 풍치를 가지고 있는 이곳 용추폭포를 마지막 9곡으로 선정하여 찬양을 한 폭포가 되는데, 금일은 너무나 많은 물이 흘려 내리므로 9곡의 맛이 완전하게 살아지고 물보라만 일어나 사진 찍기에 최악의 장소가 된다.

 

< '용추폭포' 를 배경으로 >

 

용추폭포 바로 위로 다시 물을 건너는 출렁다리가 만들어져 있으면서 출렁다리와 폭포가 하나의 산수화를 만들고 있는데, 많은 관광객이 머물고 있으면서 계곡의 상부에 있는 높은 수도산의 능선이 구름 속에 머물고 있다.

 

< 장마 속에 파란 하늘과 함께 하는 '출렁다리' >

 

< 출렁다리 입구에 한강 '정구' 선생님이 쓴 무흘구곡의 시 >

 

이곳에서 수도리 마을 까지 약 1.5Km 위에 버스 정류장이 자리하고 있지만 수도리 마을 까지 올라가는 트레킹 길은 아스팔트 포장도로 가장자리 따라 만들어져 있는데, 더 걷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상부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내려오도록 연락을 취한다.

이곳 인현왕후길 전체 거리는 약 8,5Km가 되지만 약 1.5Km를 생략하므로 금일 걷는 길은 약 7Km가 되는데, 나의 만보기에는 오늘 걸었던 숫자가 약 2만9천 보(步)를 찍고 있어 이렇게 무더운 여름철에 다소 오바(Over)한 숫자가 된다.

이내 도착한 버스를 타고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용추교로 내려가 등정식을 거행 하기로 하는데, 매번 등정식은 산행의 정점에서 추진하였던 것을 잊어 버리고 그냥 통과하므로 금월 등정식은 계곡을 배경으로 실시하니까 흘려 내려가고 있는 계곡의 물이 반주를 담당하여 준다.

 

< 백봉회 제338봉 '등정식' 을 거행하면서 >

 

< 음악의 반주를 하면서 흐르고 있는 '옥동천' >

 

4. 지례흑돼지에 빠지면서.

너무나 화창한 날씨로 인하여 좋은 산행의 끝에 찾아오는 뒤풀이 행사는 금월은 좀 거창하게 하기로 하는데, 뒤풀이 행사의 장소는 이곳 김천시 증산면에서 인접하게 있는 지례면으로 넘어가 지례 흑돼지로 만찬식을 거행하기로 한다.

약 30분 정도 달려가 지례면사무소 삼거리에 있으면서 내가 종종 방문하였던 장영선 원조흑돼지 식당을 찾아가기로 하였지만 지인이 최근 주인장이 바꾸어졌다고 하는데, 그래서 새롭게 오픈한 '수라간' 식당을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하므로 물어물어 수라간 식당으로 들어간다.

 

< '지례 흑돼지' 로 유명한 수라간 식당 >

 

< '수라간' 식당 내부의 전경 >

 

이곳 지례면에는 전국에서 유명한 흑돼지를 사욕하여 고기를 손님에게 제공하여 주는데, 문제는 토종 지례 흑돼지는 성장의 속도가 느리면서 그렇게 크게 성장하지 않아 농가에서 사육을 꺼리므로 식당을 잘 선택하지 않으면 유사한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 수라간 식당에서 판매하고 있는 '지례 흑돼지' 가격표 >

 

어찌하던 풍족한 지례 흑돼지에 빠져보는데, 흑돼지의 명성이 높아서 그런지 정말 맛 있는 고기가 되면서 매우 늦은 시간까지 식사를 끝내고 나서 대구로 출발하게 하면서 대구로 가는 길은 김천시가지를 통과하여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