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문화와 산행.

천년 고찰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인현왕후가 쓴 편지" 를 관람하려 갔지만.

용암2000 2017. 8. 26. 00:59

2017년 8월 22일. (화요일)

 

사드 설치 반대 현장이 되는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서 출발한 우리부부는 김천시 농소면과 김천시가지를 지나 직지사 입구에 있는 식당촌으로 들어가는데, 한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식사 시간을 가진다.

식당에서 다시 승용차를 이용하여 매표소 앞에 있는 간이주차장으로 이동하여 주차를 하고, 황악산 직지사를 알리는 관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관문 입구에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경로에 따른 무료 입장을 하면 길은 이내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저절로 힐링(Healing) 하기에 최적의 코스가 된다.

 

< 김천 "직지사"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관문 >

 

< "직지사" 경내를 나타내고 있는 조감도 >

 

< 매표소에서 부터 "직지사" 경내로 들어가는 힐링 길 >

 

한 5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만세교(萬歲橋) 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서 좌측으로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더불어 해설사가 머물고 있는 간이용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팜플릿 한장을 구하기 위하여 간이용 건물로 들어가 보는데, 해설사가 상주하므로 우리부부 2명을 위하여 해설이 가능한지 물어보니 기꺼이 승락이 떨어진다.

 

<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만나는 "만세교" >

 

< 만세교 옆에 만들어져 있는 "기념품 판매점 및 해설사 대기실" >
 

나는 지금 까지 김천 직지사를 수 차례 탐방하여 나의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긴 경험이 있었는데, 그 때에는 혼자 구경하면서 관람한 내용을 기술하였지만 오늘은 해설사 내용을 경청하면서 그 내용을  기술하여 보기로 한다.

 

< 만세교 앞에서 경내로 들어가는 길과 함께 하고 있는 "비석" 군락지 >

 

해설사가 준비하는 동안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직지사 연역을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먼저 그 내용을 읽어 보기로 한다.

내용에 따르면 직지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 땅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일선주(현재 : 선선군)으로 숨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안내문" >

 

그 때 신라의 왕녀(성국공주)의 병을 고쳐 준 인연으로 불교가 허용되어 선산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서기 418년 황악산 아래 사찰을 건설하여 직지사(直指寺)라 하였는데, 김천은 선산의 도리사와 함께 신라 불교의 발상지가 된다.

사찰 이름은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땃다는 이야기 또는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손가락으로 황악산을 가르키면서 명당 터를 일러주었다고 하는데, 곧을 직(直)과 손가락 지(指) 자를 따서 "직지사(直指寺)" 라 하였다고도 한다.

청건 이래 신라시대에 두번의 큰 중건을 하였으며 두번째 중건 때가 되는 930년 천묵대사(天默大師)가 금자대장경(金子大藏經)을 서사하고 경순왕이여  경명제자(經名題字)를 썼는데, 이는 고려 대장경 보다 590년 앞선 직지사에서 금 글씨로 대장경을 펴냈다는 것이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 능여조사(能如祖師)가 서기 927년 대구 공산 전투에서 패해 위기에 처한 태조 왕건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는데, 후백제 견훤을 물리치게 한 공으로 토지 천결(약 3백여 만평)을 하사 받는 등 고려 왕실의 지원으로 크게 융성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불교가 극도로 탄압을 받았으나 조선 2대 임금이 되는 정종의 어태(御胎)가 직지사 대웅전 뒤편 북봉에 안치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을 받아 금산현이 금산군(金山郡)으로 승격되고 조선왕조로 부터 보호를 받는 사찰이라고 한다.

또한 직지사는 사명대사의 출가 사찰로 유명한데, 1559년 신묵대사의 제자가 되어 직지사로 출가한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병을 이끌고 왜병을 물리치고 임진왜란 전. 후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는데 큰 공을 세워 조선 조정으로 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직지사는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전각 43개 동(棟) 중 3개의 동(일주문, 천왕문, 비로전)만 남기고 모두 전소되었는데, 임진왜란 후 70여 년 동안 새롭게 전각 건물을 건립하여 현종 3년(1662년) 까지 중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병합하고 난 이듬해가 되는 1911년 새롭게 사찰령을 제정하여 전국의 사찰을 탄압하므로 직지사 사세(寺勢)도 크게 열악하면서 당우와 암자 또는 많은 건물이 훼손되었으나, 1954년 다시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승격되어 대가람의 면모로 회복한 사찰이라 하겠다.  

이렇게 안내문을 정독하고 나서 해설사와 함께 경내로 들어가기로 하는데, 경내로 들어가는 오솔길 오른편 야산 위에 공덕비 군락지와 함께 상사화가 만발하게 피어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 본격적으로 "경내" 로 들어가는 오솔길 >

 

< 야산 위에 자리하고 있는 "공덕비" >

< 오른편 야산 위에 피어 있는 "상사화" >

 

해발 1111m 황악산 정상에서 뻗어내리는 산맥이 뱀과 같이 오르 내림을 하면서 직지사 뒤편에서 뱀의 머리와 같은 사두혈(蛇頭穴) 능선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사두혈 지점에 울창한 금강송 숲 단지가 조성하면서 정종의 태(胎)를 묻었던 태실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 직지사 뒤편으로 뻗어내리고 있는 북봉 "사두혈" 능선 >

 

이후 태실은 왕실과 직지사의 보호를 받으면서 존치되어 왔지만 1928년 일제의 만행으로 파헤쳐 지면서 태를 담은 항아리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안이 되었고, 다양한 석물들 중 지주석 일부분은 성보박물관 앞 마당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동석은 극락전 앞 뜰에 안치하고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올라가면 사찰의 첫번째 문이 되는 일주문(一柱門)에 도착하는데, 직지사 일주문은 다른 사찰 일주문과 차별나게 지붕을 받치고 있는 공포 마다 한자가 써 있고 뒤편으로 돌아서 가면 자하문(紫霞門)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직지사의 첫번쨰 문이 되는 "일주문" >

 

< 일주문 "공포" 에 쓰여 있는 한자 >

 

< 일주문 뒤편에 붙어있는 "자하문" >

 

일주문을 통과하여 조금 더 올라가면 경내의 2번째 문이 되는 대양문(大陽門)에 도착하는데, 대양문에서 몇 발국만 더 이동하면 3번째 문이 되는 금강문(金剛門)에 도착한다.

 

< 직지사의 2번째 문이 되는 "대양문" >

 

< 직지사의 3번째 문이 되는 "금강문" >

 

금강문 내부로 들어서면 벽면에는 금강역사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 금강역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있지만 오른편 금강역사의 입은 꽉 다물고 있어 우주의 이치에서 처음과 끝이 되는 알파와 오메가이라 하겠다고 해설한다.

금강문에서 약간 올라가면 사찰의 4번째 문이 되는 사천왕문(四天王門)이 거의 90도 방향으로 꺽어서 건축되어져 있는데, 문의 내부에 모시고 있는 사천왕은 어느 사찰의 사천왕 보다 거대하게 제작 되어져 더욱더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사천왕이 된다. 

 

< 직지사의 4번째 문이 되는 "사천왕문" >

 

< 한국에서 제일 크며 왼편에 모시고 있는 "사천왕" >

< 한국에서 제일 크며 오른편에 모시고 있는 "사천왕" >

 

사천왕문 앞 축대 옆에 넓은 바위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바위는 사명대사가 출가하기 전 어린 나이 때 부모님의 사망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 머나먼 밀양에서 직지사 까지 걸어오므로 지쳐서 잠이 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 "사명대사" 가 잠이 들었다는 바위 >

 

사천왕문에서 몇단의 계단으로 올라서면 마지막 문이 되는 "만세루(萬歲樓)" 라는 루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 1층으로 사람들이 왕래하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통로의 높이가 사람 키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고 통과할 수 없게 하는데, 무언 중 고개를 숙여 부처님에게 존경심을 표시하게 만든다.

 

< 마지막 문이 되는 "만세루" >

 

만세루를 지나면서 몇단의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넓은 마당에 도착하는데, 마당 좌우에는 문경 도천사지에서 이전한 보물 제606호 삼층 석탑이 서 있다.

우측의 석탑 뒤편으로는 심검당(尋劒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좌측 석탑의 뒤편에는 육화당(六和堂) 및 범종각 건물이 배치하고 있다.

 

< 만세루를 통과하면 만나는 "삼층 석탑과 대웅전" >

< 우측 삼층 석탑과 함께 하고 있는 "심검당" >

< 좌측 삼층 석탑과 함께 하고 있는 "육화당" >

 

< 육화당과 인접하게 건립되어져 있는 "범종각" >

 

해설사는 더위로 인하여 시원하게 관람이 가능하게 하는 육화당 건물 뒤편에 있는 성보박물관으로 먼저 들어가 각종 문화재를 관람하고 나서, 경내의 불당을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므로 박물관 건물로 안내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나의 불로그에는 스토리의 연속성을 위하여 경내의 불당을 먼저 기술하기로 하는데, 마당의 중앙 통로를 이용하여 대웅전 방향으로 들어가면 마당 좌측편에는 환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포대화상이 자리하고 있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 대웅전 건물 앞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포대화상" >

 

대웅전 건물 앞 왼편으로 한기의 석등과 더불어 좌우 정료대가 자리하고 있으며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해설사는 혼신의 노력으로 설명이 이어지는데,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만 단독으로 보물로 지정이 될 정도의 가치를 가진 문화재이라고 한다.

 

< 대웅전 앞에 있는 "석등 및 정료대" >


이곳 계단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계단과 계단 사이에 틈이 발생하지 않으면서 견고하게 만들어지고 계단석 바닥에는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으로 하나 하나 찍어 작은 홈을 만들었다.

그러고 난간석 좌우에 용으로 제작되어져 있으면서 좌측의 용은 입을 벌리고 있지만, 우측의 용은 입을 다물고 있어 여기에도 인간의 삶에 있어 시작 및 끝을 나타내고 있다.

 

< 보물로 지정 되어 있으며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용 난간석" >

 

계단으로 올라서면 보물 제1576호 대웅전 건물을 만나는데, 대웅전 건물에도 건축학적으로 많은 비밀이 숨어 있어 전부 이야기 하기에 너무나 전문성을 요구하므로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한다.

< 건물 지붕 아래 합각 지점에 보강하고 있는 "지네발" >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불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모시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곳 직지사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이렇게 독특하게 협시불을 모시고 있는 것은 임진왜란 전에는 2층의 건물로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 이라는 건물로 지어져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선조 35년(1602년)에 1층의 대웅전(大雄殿)으로 새롭게 건립하였다.

이후 인조 27년(1649년)에 중영(重營)을 하였으며 영조 11년(1735년)에 다시 중창 하였는데, 건물 규모에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건축물이다.

지붕의 형식은 겹치마 팔작지붕으로 직지사의 중심 법당으로 크고 짜임새가 있는데, 높은 천장에 화려 하면서 절제된 장식은 종교적인 장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세분의 부처님이 앉아 계신 수미단은 보물 제185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수미단은 효종 2년(1651년)에 조성된 것으로 용, 물고기, 개구리, 연꽃 등 여러 무늬들을 소박하게 조각하면서 채색법을 사용하므로 화려한 불단이 된다.

 

< 대웅전 내 삼존불과 함께 보물 1859호 및 670호로 지정되어진 "수미단과 후불 탱화" >

 

부처님 뒤편으로 각 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그린 석가모니불과 약사불 및 아미타불을 그린 높이 6m의 후불 탱화 3폭이 높게 걸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그린 탱화는 영조 20년(1744년) 직지사의 세관스님 등 16명의 화승들이 그린 그림으로 보물 제670호로 지정이 되어져 있다고 한다.

이 밖에 건물의 중요한 포인트 등의 해설을 경청하면서 대웅전 주변에 있는 전각들을 관람하여 보는데, 오른편으로 감은전(感恩殿), 성좌각(星座閣)이 자리하고 있다.

왼편으로 이동하면 관음전(觀音殿), 향적전(香積殿), 사명각(四溟閣), 응진전(應眞殿), 벽안당, 명부전(冥府殿) 건물이 연속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 대웅전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감은전" >

 

< 감은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성좌각" >

 

< 대웅전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관음전" >

 

< 관음전 내에 모시고 있는 "관세음보살" >

< 관음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향적전" >

< 관음전 왼편 앞에 자리하고 있는 "사명각" >

< 사명각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응진전" >

 

< 응전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벽안당" >

 

< 응진전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 "명부전" >

< 사명각 앞에 있는 "단풍 및 배롱나무" >

 

명부전 왼편에서 일단의 축대 위로 다소의 넓은 마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당 중앙에는 보물 제607호가 되는 문경 도천사지에서 이전한 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비로전(毘盧殿) 건물이 있다.     

 

< 명부전 왼편 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 석탑과 비로전" >

 

비로전 건물 내에는 천개의 부처님을 봉안하므로 '천불전(千佛殿)' 이라고도 불려지는데, 이 건물은 고려 때 능여조사(能如祖師)에 의해 처음으로 세워진 건물로 정면 7칸에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축물로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소실을 면한 불전이라 한다.

불전 내에는14줄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는 층층대 위로 경주 옥돌로 조성한 천개의 불상이 빽빽하게 진열하고 있는데, 그 불상 중 발가벗은 동자상을 첫 눈에 발견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로 신혼부부가 많이 찾아오는 불당이라 하겠다.

 

< 14줄 계단으로 배치하고 있는 "천불상" >

 

비로전 앞에 있는 마당 좌측편으로 약사전(藥師殿)과 더불어 스님들이 기거하는 명원료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마당 전면에는 비로전으로 들어오는 문이 되는 2층의 황악루(黃嶽樓) 루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비로전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약사전" >
 

< 약사전과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는 "명원료" >

< 비로전 마당 앞에 만들어져 있는 "황악루" >

 

황악루 앞으로 내려가면 일반 가정집과 비슷하게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으면서 내부에 "ㄱ자" 형태로 서별당과 망일전 이라는 2개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이 건물 뒤편으로 돌아서 경내 밖으로 나가면 황악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만난다.

 

<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서별당 및 망일전 " >

 

< "황악산" 에서 흘러 내리고 있는 개울 >

 

개울에 걸쳐 있는 도피안교(到彼岸橋) 다리를 건너가면, 넓은 잔디광장과 함께 광장 뒤편으로 2층 루각 형태의 안양루(安養樓)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안양루의 루각 건물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극락전(極樂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출입을 엄금한다는 펫말이 붙어있다.

 

< 개울을 건너는 "도피안교" >

< 도피안교를 건너면 만나는 "안양루" >

< 안양루를 통과하면 자리하고 있는 "극락전" >

 

다시 잔디광장으로 나와 광장의 왼편으로 들어가면 정종의 태실에서 버려져 있었던 중동석 한기가 달랑 서 있는데, 주변으로 안내문을 비롯하여 아무런 보호시설도 없어 문화재에 대하여 너무나 소흘한 것 같다.

 

< 극락전 앞 잔디광장에 자리하고 있는 "중동석" >

 

다시 도피안교 다리를 건너 서별당의 담장 옆으로 조금 들어가면, 오늘 큰 기대를 가지면서 찾아온 성보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성보박물관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1.0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여야 하지만, 경로의 혜택으로 무료 입장이 가능하게 한다.

 

< 직지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성보박물관" 전경 >

 

청풍료(淸風寮) 건물을 개조하여 1995년 10월에 개관한 직지사 성보박물관은 경상북도 김천시, 구미시. 상주시, 문경시, 예천군 등 5개의 시와 군에 산재하고 있는 60여 개 사찰에서 보관 또는 전하여 내려오는 불교 유물과 전국의 범종, 비문 등을 탁본한 작품 5.3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소장품 내용으로는 국보 1점을 비롯하여 보물 10점 등의 지정 문화재를 포함하여 불경, 불상, 불화, 진영, 의식구, 공양구, 장엄구, 조각품 등 불구(佛具) 및 탁본 전시품을 보관하고 있는데,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많은 자료가 된다.

박물관 내부로 입실하자 마자 해설사가 중요한 문화재 하나 하나를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이번 기획전으로 각 사찰에서 보관하고 있는 범종의 외형이 있는 조각을 많이 탁본하여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 범종의 외형에 새겨져 있는 각종 "조각" 탁본 >

 

< 범종에 새겨져 있는 "부처님" 탁본 >

 

더불어 벽면 곳곳에 보물급 탱화도 많이 전시하면서 넓은 공간을 찾지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문화재를 짜임새 있게 진열하므로 더위도 시키면서 다소 꼼꼼하게 관람 할려고 하였으나 해설사 일정으로 수동적으로 따라 다녀야 한다.

 

< 다양한 "탱화" 의 전시품 >

 

< 보물 제1638호 탱화 "수다사 영상회상도" >

 

< 보물 제1864호 탱화 "고방사 아미타여래설법도" >

 

< 보물 제319호 "석조약사여래좌상" >

 

전시실 중앙으로 이동하면 이곳 성보박물관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국보 제208호로 지정이 된 선산 도리사에서 세존사리탑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진 "금동육각 사리함" 앞에 도착하는데, 실물을 감상하면서 기나긴 해설이 이어진다.

 

< 국보 제208호 "금동육각 사리함" >

 

< 보물 제1306호 "묘법연화경" >

 

그러고 나서 내가 금일 찾아와 관람을 희망하고 있는 "인현왕후가 쓴 편지" 에 대하여 문의를 하니 편지는 박물관 수장실에 보관하므로 아직 해설사도 직접 관람하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언제가 특별 전시전이 개최하면 알려 주겠다고 한다.

 

< "성보박물관" 내부 전시실 전경 >

 

박물관 실내에 전시하고 있는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적당한 온도 및 습도를 유지하고 있는 신선한 공기로 밖으로 나가기 싫지만, 시간적 제약을 받고 있는 해설사를 위하여 박물관 주변에 산재하고 있는 야외 전시장을 관람하여 본다.

야외 전시장에는 다양한 탑과 더불어 부처, 종, 장엄구 등 문화재를 전시하므로 한참 동안 돌아보고 나서 다른 전각을 관람하기 위하여 대웅전 방향으로 들어가는데, 대웅전 앞에서 해설사는 대기실로 돌아가기로 한다.

 

< 정종의 태실을 보호하였던 "난간석" 일부 >

 

< 야외 전시장에 진열하고 있는 "부처" >

< 성보박물관 건물 주변에 전시하고 있는 "쌍계사지" 동종 >

< 야외 전시장에 진열하고 있는 "석조물" >

 

우리부부는 경내를 다시 구경하기로 하면서 천천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로 어느 건물의 처마 밑에서 무한정 기다림을 가지고 있다가 어느 정도 비가 그치므로 사찰을 떠나기로 한다.

 

<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설법전" >

 

해설사를 통하여 오늘 김천 직지사에 대하여 새로운 지식을 많이 접하였는데,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제고(提高) 시킴과 동시에 경내를 벗어나기로 한다.

직지사는 한국 최초로 년(年) 중 템플스테이를 추진하고 있는데, 설법전(說法殿) 및 만덕전을 비롯하여 많은 부속 건물들이 함께 하고 있는 천년고찰이라 하겠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