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문화와 산행.

비운의 여왕 인현왕후가 거닐었던 김천시 수도산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수도암" 의 관람.

용암2000 2017. 8. 11. 09:54

2017년 8월 8일.(화요일) 

 

아침 부터 농원에서 잠깐 제초를 제거하고 있으니 팥죽 같이 흘러내리는 땀으로 무더위를 날려 보내기 위하여 승용차에 몸을 의존하면서 길을 나서 보기로 하는데, 오늘은 성주댐의 상부에 있는 무흘계곡 방향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승용차는 성주읍 및 가천면사무소를 지나 드라이브도 겸하면서 성주댐 방향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한강 정구 선생님이 애찬한 무흘구곡 중에서 제1곡과 제2곡은 성주댐의 하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댐의 상부에는 제3곡에서 부터 제9곡이 자리하고 있다.

제3곡과 제4곡을 지나 조금 더 계곡 상부로 올라가면 성주군 금수면과 김천시 증산면의 경계점에 도착하는데, 경계점에서 부터 제5곡이 시작하여 가야산과 능선으로 연결하고 있는 수도산 산자락 까지 제9곡이 형성하고 있다.

무흘구곡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9곡 용추폭포로 들어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수를 보면서 무더위를 한참 날려 보내다가 다소 지겨움이 유발하는 것 같아 옛날에 수시로 방문하였던 수도암으로 올라가 보기로 한다.

급한 경사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도로 따라 한참 올라가면 도로 가장자리에는 "인현왕후길" 이라는 트레킹 길이 새롭게 만들어져 있는데, 작년 여름에 방문하였을 때에는 없었던 인현왕후길이 왜 이곳에서 생겼는지 의심을 가지면서 수도암 주차장에 도착하여 진다.

수도암은 인접하게 있는 청암사(靑巖寺)의 산내 암자인데, 가야산과 연결하고 있는 해발 1317m 수도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수도암은 해발 1080m 위치의 높은 곳에 자리하면서 차량 통행이 가능하므로 쉽게 오르내림을 할 수 있는 암자이다.

나무 숲 사이로 조성하고 있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서 경내로 들어가는 계단 오른편으로 수도암을 알리는 안내문이 자리하고 있어 내용을 읽어보는데, 수도암(修道庵)은 청암사와 함께 신라 현안왕 3년(859년) 도선국사가 쌍계사의 소속 암자로 창건한 이래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에 의해 전소가 되었다고 한다.

 

            < "수도암" 입구에 있는 안내문 >

 

그 후 1900년에 포응화상(抱應和尙)이 건물을 중건하였지만 근대에 들어 건물이 많이 퇴락하였으나 1969년 부터 법전화상(法傳和尙)이 건물을 새롭게 중건하였고, 1975년에 선원(禪院)을 포함하여 많은 건물을 중축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다.

높은 계단 위에 있는 "수도암(修道庵)"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대문을 통과하면 넓은 마당이 자리하고 있고, 마당의 뒤편으로 높은 축대와 더불어 왼쪽면으로 2단의 돌계단 위로 주불을 모시고 있는 본당에 눈에 들어온다.

 

                < 높은 돌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 "봉황루" >

 

            < 내부 마당에서 바라보는 "봉황루" >

          < 2단의 돌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 "본당" >

 

먼저 마당의 오른편 가장자리 축대 아래에 있는 샘으로 천천히 걸어가 쪼롱박으로 한 바가지 물을 마시고 나서 샘의 오른편에 있는 관음전(觀音殿) 건물을 관람하여 보기로 하는데, 관음전 건물은 일반 사대부 집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건물이면서 중앙에 작은 불상을 모시고 있다.

 

            < 마당의 오른편으로 샘과 함께 하고 있는 "관음전" >

 

         < 관음전 내에 모시고 있는 "불상" >

 

관음전 건물 오른쪽 뒤편으로 이어지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는 수도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산행길 이정표가 자리하고 있으면서 오른편으로 나한전(羅漢殿) 및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나한전에는 오백나한을 모시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곳 나한전에서는 몇명의 나한님을 유리함 속에 모시고 있는 것이 특색이 되어진다.    

 

              < 관음전 뒤편으로 "수도산" 정상으로 가는길 >

 

            < 관음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나한전과 요사채" >

 

            < 나한전 내 유리함 속에 모시고 있는 "나한" >

 

            < 관음전에서 바라보는 "수도산 정상과 수도암" 전경 >

 

다시 관음전 앞으로 내려와서 본당 주변을 관람하기 위하여 높은 돌계단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너무나 높은 돌계단으로 인하여 중간에 한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평면을 건너 다시 2단의 돌계단으로 올라가게 되면서 돌계단 측면 경사지에는 꽃과 잎이 상호 만나지 못하면서 피고 진다는 상사화 꽃들이 만발하게 피어있다.

 

             < "본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

 

           < 경사면 따라 피고 있는 "상사화" >

 

상사화를 구경하면서 마지막 돌계단 위로 올라서면 또 다시 넓은 공간과 함께 3층 석탑 및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적광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적광전 오른편으로 석등 등 다양한 석조물과 더불어 약광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본당과 함께 하는 "3층 석탑" >

 

             < 본당과 약광전 뜰 앞에 있는 "석조물" >

 

3층 석탑은 대적광전과 약광전 앞에 각각 한기씩 자리하고 있으면서 양쪽 석탑은 보물 제297호로 지정이 되어져 있는데, 대적광전 앞에 있는 서탑의 높이가 4.25m 이며 각층의 탑의 집붕돌이 매우 얇고 넓으며 1층 탑신의 각면에는 여래좌상을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 대적광전 앞에 있는 "서탑" >

 

대적광전(大寂光殿) 내에 모시고 있는 주불의 총 높이가 2.51m 이면서 머리의 높이가 70Cm가 되어지고 대좌의 높이가 1.19m 가 되어지는 거대한 불상으로서 한손으로 다른 한손의 손가락을 움켜지고 있는 지권인(智拳印) 모습을 하므로 인하여 비로자나불이 되어진다고 하는데, 이 석불은 보물 제307호로 지정되어져 있다고 한다.

 

           <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적광전" >

 

석불의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가 작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어져 있으면서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이 풍만하며, 가늘게 치켜 뜬 눈과 평평한 코 및 굳게 다문 입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 대적광전 내에 모시고 있는 "비로자나불" >

 

대좌는 상· 중· 하 3개 부분으로 구성된 8각 연꽃 대좌로 상대(上臺)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앙련(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 잎)이 2줄로 교차되어 있고, 앞면에 3마리 사자상과 용머리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 비로자나불이 앉아 있는 3단의 "대좌" >

 

대적광전 오른편으로 이동하여 약광전(藥光殿) 건물을 관람하여 보는데, 약광전 내에 모시고 있는 약사여래불은 보물 제296호로 지정이 되어지고 이곳에 모셔진 불상 또한 높이 1.54m의 자그마한 석불로 고려시대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어 진다고 한다.

 

          < 대적광전 오른편에 있는 "약광전" >

 

석불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으면서 이마 한가운데에 커다란 백호(白毫)가 박혀 있고,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풍만한 모습이면서 눈과 코는 가늘고 짧으면서 입술은 두툼한 편이라 하겠다.

 

               < 약광전 내에 모시고 있는 "약사여래불" >

 

약광전 앞에 동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동탑의 높이는 서탑 보다 약간 낮은 3.76m 이면서 1층 탑신 각면에 감실과 같이 깊게 파여 지면서 감실 내부에 여래좌상을 양각으로 새겨두고 있으면서 조각의 수법이 매우 단아하고 명확하게 새긴 것이 특색이라 하겠다.

 

              < 약광전 앞에 있는 "동탑" >

 

이 대적광전과 약광전이 자리하고 있는 뜰 앞에 서서 원근의 산을 바라보면, 깊은 계곡과 함께 가야산으로 연결 되어지는 지맥의 끝자락에 높은 가야산 정상이 한폭의 그림 같이 머물고 있어 수도암이 정말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게한다.

 

            < 대적광전과 약광전 뜰 앞에서 바라보는 "가야산" 전경 >

 

암자가 너무나 높은 곳에 위치하므로 이곳에는 제법 쌀쌀함을 느끼지므로 인하여 떠나가기에 아쉬움을 가지지만 집에 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감안하여 암자를 떠나기로 하는데, 경내의 왼편으로 스님이 머무는 요사채와 더불어 조사전(組師殿) 등 많은 건물과 더불어 텃밭을 보면서 주차장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 요사채와 함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조사전" >

 

승용차를 몰고 내리막 길로 다시 내려가면 도로변으로 인현왕후길을 만나면서 주변으로 길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이 자리하므로 그 내용을 읽어보는데, 역사적 사극의 주인공으로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인현왕후(仁顯王后) 및 장희빈(張(禧嬪)" 이라는 여인들의 싸움에서 결국 한명은 저주에 대한 원한으로 다른 한명은 사약으로 2명 모두 30대에 세상을 떠난다는 스토리의 장본인이 되는 인물들이다. 

 

     < "인현왕후길" 을 알리는 안내문 >

 

인현왕후는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일찍 돌아가자 1년 후 숙종의 어머니가 되어지는 명성왕후 김씨의 외가 친척이 되어지는 서인의 거두 송시열 선생님의 추천으로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어지지만, 남인의 추천으로 정일품 빈(嬪)의 서열 까지 올라갔던 장희빈과의 싸움에서 희생양이 되면서 폐위가 되어지는 인물이다.

인현왕후는 폐위를 당한 후 어머님의 외가집에 되어지는 이곳 김천 청암사로 내려와서 경내에 머물면서 종종 수도산을 거닐면서 복위를 기원하였다가 사찰에 머문지 3년만에 다시 왕비로 복위를 하는데, 인현왕후는 청암사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먹지에 금색으로 쓴 편지와 향(香)을 포함하여 3가지 하사품을 내린다.

 

  < "인현왕후길" 에 자리하고 있는 조형물 >

 

현재 편지와 함께 하사품은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고 하며,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민초들의 존경을 한몸으로 받았던 인현왕후의 역사적인 현장을 기리기 위하여 청암사와 수도암 주변으로 트레킹 길을 조성하여 2016년 여름에 오픈하였다고 한다.

 

           < 언젠가 걷고 싶은 "인현왕후길" 조감도 >

 

이러한 역사적인 길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인지하므로 언젠가 나도 인현왕후길을 한번 걸어보고, 또한 김천 직지사도 다시 방문하여 인현왕후의 편지와 함께 하사품도 관람하여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집으로 떠나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