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일본)

대마도 이즈하라에 있는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및 팔번궁신사' 를 돌아보면서.(2)

용암2000 2023. 8. 1. 20:55

2023년 7월 27-28일.(1박2일)

1. 첫째날 : 7월 27일(목요일)

2) 가네이시 성터의 방문,

티아라(Tiara) 종합소핑센터 건물에서 남쪽방항으로 한 5분 정도 걸어가면 '가네이시 성터(金石 城跡)' 에 도착하는데, 가네이시 성에는 16세기 이후 '소(宗)' 씨 가문이 거주하였던 성(城)이었지만 내분으로 인하여 모든 건물이 소실이 되었다.

 

< '이즈하라' 시가지의 조감도 >

내분을 벗어나면서 부터 소 모리카타(宗 盛賢)는 가네이시 저택을 다시 축조하였고, 제3대 대마도 번주가 되는 소 요시자네(宗 義眞)는 화염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동네를 정비 함과 동시에 가네이시 저택 수리에 착수한다.

또한 고쿠분지를 이동시키면서 성벽을 정비하고 누문(樓門)을 새롭게 지었는데, 간분 9년(1669년) 까지 공사를 계속하여 가네이시 성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 가네이시 성터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누문' >

 

< '가네이시 성터'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하지만 성내 대부분의 건물이 다시 소실되어 방치하고 있다가 지방자치단체에서 한국 관광객을 위하여 누문 하나만 복원하고 또한 박물관을 건축하였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박물관을 관람하지 않아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 누문 옆에 건립한 '박물관' 건물 >

3) 조선통신사들이 머문 장소의 탐방.

가네이시 성터의 누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조선통신사막부접우의 지(朝鮮通信使幕府接遇의 地)' 이라는 입석 한기가 서 있는데, 이곳이 한때 조선통신사들이 머문 곳이라고 한다.

 

< '가네이시 성터' 로 들어가는 일행 >

 

< '조선통신사막부접우의 지' 이리고 쓰여있는 입석 >

1952년 임진왜란의 발생하므로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 단절이 일어나는데,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갑자기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애도 막부를 수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시(德川家康)가 조선과 국교 회복을 요청한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외교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포로의 송환, 일본 정세의 파악 등을 위하여 광해군 1년(1609년)에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는 조선의 통신사를 맞이하면서 막부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통하여 명(明)과 조선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일본은 조선의 통신사가 지나가는 길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나와 구경하였으며 더불어 일본의 지식인들은 통신사에게 풍족한 대접과 함께 필답의 문서를 요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통신사는 약 300-500명으로 구성하면서 한양을 출발하여 충주, 문경, 밀양을 거쳐 부산에 도착한 후 약 6척의 배를 이용하여 대마도 및 시모노세키에서 머물었다가 다시 배를 이용하여 히로시마를 거쳐 오사카에 도착하는데, 오사카에서 부터 육로를 이용하여 교토 및 도쿄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조선통신사들이 입항하여 머물었던 곳이 이곳 가네이시 성 이었는데, 현재는 모든 건축물이 소실이 되어 아무 것도 없는 빈 공터로 남아 있으면서 오직 입석 한기로 그때의 흔적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 방문지가 되는 팔번궁 신사를 구경하고 나서 '나카라이 토스이' 저택을 구경하려 가는 길 개울가에 조선통신사 행렬을 기념하기 위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보지 않은 개울가에 그려져 있어 매우 불쾌하게 만든다.

 

< 이즈하라 중심지로 흐르고 있는 '개울' >

 

< 개울가에 그려져 있는 '조선통신사 행렬도' >

4) 덕혜옹주의 결혼봉축기념비 관람.

조선통신사막부접우의 지를 기록하고 있는 입석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덕혜옹주의 결혼봉축기념비(結婚奉祝記念碑)가 자리하고 있는데. 기념비 옆에 덕혜옹주 유래를 기술하고 있어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 '이왕조종가결혼 봉축기념비' 를 가리키는 이정표 >

 

< 덕혜옹주의 '결혼 봉축기념비' >

" 조선국(朝鮮國) 제26대 왕이 되는 고종(高宗)의 왕녀가 되는 덕혜옹주(德惠翁主)는 1931년 5월 '소 다케유키공(宗 武志公)' 과 결혼하여 동년 11월에 대마도를 방문하였다.

옛 대마도 도주(島主)가 되는 소 다케유키가 조선의 왕녀(王女)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대미도를 방문하였으므로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이 비(碑)는 두분의 성혼(成婚)을 축하하가 위하여 대마도(對馬島) 거주 한국인들이 건립하였다.

한편 청수산성(淸水山城)에는 대마도 주민들이 경축하여 세우고 심었던 기념비(記念碑)와 철쭉이 지금도 잘 남아있다.

결혼생활은 많은 고난(苦難)이 있었으나 딸 '소 마사에(宗 正惠)' 를 낳아 서로 신뢰(信賴)와 애정(愛情)이 깊었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는 갈등이 심하여 두분은 1955년에 이혼하였으며 무지공(武志公)은 1985년에 덕혜옹주는 1961년에 귀국 후 1989년에 별세(別世)하였다.

이제 역사(歷史)에 묻혀있던 이 기념비(記念碑)를 재건하여 두분의 힘들었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양국민의 진정한 화해(和解)와 영원한 평화를 희망한다."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덕혜옹주(德慧翁主)는 고종(高宗)의 고명딸로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동생으로 생모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梁)' 씨가 되는데, 양씨는 본래 궁녀였다가 승은(聖恩)을 입어 덕혜옹주를 낳고 후궁이 된다.

고종이 59세일 때 얻은 늦둥이이자 당시 유일한 고명딸이어서 덕혜옹주는 극진한 총애를 받으면서 어린 시설을 보냈는데, 많은 일화를 가진 옹주가 된다.

고종이 덕혜옹주를 보기 위하여 입실하였을 떄 마침 유모 '변복동' 상궁은 누워서 덕혜옹주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는데, 변 상궁은 일어나서 예를 갖추려 하였지만 고종은 아기가 놀라거나 울까 봐 유모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황제 앞에 누울 수 있는 사람은 변 상궁 뿐이다' 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덕혜옹주는 덕수궁에서 자라던 어린시절에는 '덕수궁의 꽃' 아라는 별칭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운의 덕혜옹주는 국란으로 인하여 대마도 번주가 되는 소 다케유키(宗 武志公)와 전격 결혼을 하였지만, 원활한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고 말년에는 정신분열증을 알아 이혼하고 한국 경복궁 낙산재에서 유모 변 상궁 및 올케가 되는 '이방자' 여사와 함께 기거하였다.

1968년 가을 덕혜옹주는 창덕궁 낙선재 내에 있는 수강재로 옮겼는데, 그 무렵 전 남편이 되는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그를 미워하던 종실 관계자들이 매몰차게 쫓아 버렸다.

그후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수강재에서 77세의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下直) 하였는데, 옹주가 맑은 정신일 때 썼다는 한장의 낙서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이구씨가 보고 싶어요.' 이라는 내용을 남겼다고 한다.

 

< 결혼 봉축기념비' 안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

 

< 가네시아 성터 내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종합 운동장' >

5) 팔번궁신사를 돌아보면서.

가네이시 성터에서 부터 시가지 방향으로 한 10여 분 정도 걸어가면 이즈하라 중심지를 관통하는 국도 변에 '팔번궁신사(八幡宮神社)' 가 자리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신사는 산속 또는 산기슭에 자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 이즈하라 중심지 국도 변에 '팔번궁신사' 를 알리는 도리이 >

하지만 이곳 팔번궁신사는 이즈하라 도심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어 마치 도심 공원과 같은데, 팔번궁신사 내에는 일본의 초대 천왕이 되는 오진천왕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신사의 영역을 표시하고 있는 첫번째 도리이를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주차장 끝지점에 팔번궁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의 초입에 두번째 도리이가 되는 2개의 도리이가 나란하게 서 있다.

 

< 주차장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두번째 2개의 '도리이' >

오른편 도리이를 지나면 다시 2개의 계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오른편 계단은 '보물전(寶物殿)' 으로 올라가는 계단이고 왼편 계단은 안덕천왕을 모신 이마미야신사 즉 '금궁신사(일명 : 마리아신사)' 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도리이' 및 '2개로 나누어지는 계단' >

왼편에 떨어져 있는 도리이 뒤편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끝지점에 신사 건물 한채가 자리하고 있지만. 내부에는 어떠한 신도 모시지 않고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

먼저 보물전을 관람하기 위하여 계단으로 올라가면 계단의 끝지점에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신문(神門)이 자리하고 있는데, 신문의 양쪽 윗면에는 우리나라 사찰 입구에 모시고 있는 사천왕과 비슷한 불상이 놓여있다.

 

< 팔번궁신사의 입구에 있는 '신문' >

 

< 신문 앞 '팔번궁신사'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신문을 통과하면 중앙으로 참도(參道)이라는 길이 만들어져 있으며 참도의 길 끝지점에 '보물전(寶物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참도의 길 왼편 야산 기슭에는 수 많은 석탑과 비석이 서 있다.

 

< 보물전으로 들어가는 '참도' 길 >

 

< 참도 길의 왼편 야산 기슭에 만들어져 있는 석탑 및 비석' >

보물전 바로 앞 왼편으로 '데미지야' 이라고 불려지는 한기의 우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의 우물을 마시는 물이 아니고 신사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손을 씻고 입을 헹구는 물이 된다.

 

 

< 손과 입을 헹구는 '데미지야' >

우물의 옆으로 용(龍) 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석조물과 함께 한 마리 '마신(馬神)' 상이 서 있는데, 마신 상의 허리에는 일본 천왕의 마크가 되는 황금색 꽃을 달고있다.

 

< 용의 조형물과 함께 하고 있는 '마신' >

보물전 앞에는 일본 어느 신사와 같이 가능한 5엔 짜리 동전을 넣는 통이 자리하고 있는데, 동전을 넣을 때 나는 소리에 신(神)이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 앉게 하면서 신에게 소원을 빈다고 한다.

 

< 천왕의 위폐를 모시고 있는 '보물전' >

 

< 보물전 내에 안치하고 있는 '천왕' 의 위패 >

보물전 뒤편으로 들어가면 신사 박물관이 조성되어 있지만, 현재 박물관의 문이 잠겨져 있어 관람이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가이드는 신사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면 안덕천왕을 모시고 있는 이마미야신사로 안내를 한다.

 

< 보물전 뒤편으로 들어가는 '길' >

 

< 보물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박물관' >

 

< 신사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이마미야신사' >

 

이마미야신사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장수의 딸 마리아와 마리아의 아들을 제사 지내는 사당인데. 가문의 몰락으로 인하여 마리아는 불행한 생(生)을 마감한다.

그로 인하여 대마도 사람들은 마리아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그이 아들과 함께 이곳 사당에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사당 주변으로 아름들이 녹나무와 함께 석등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신사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눅나무' >

 

< 제일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신사' >

더위로 인하여 가이드는 일행을 계단에 앉게 하면서 신사의 내력과 더불어 다음 관광지가 되는 '나카라이 토스이' 저택에 대하여 관람의 효율성(效率性)을 높이기 위하여 먼저 설명하기 시작한다. - 첫째날 2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