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충청)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에 자리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 고택을 찾아서.(5)

용암2000 2023. 9. 14. 17:37

2023년 9월 6-8일.(2박3일)

2. 둘째날 : 9월 7일.(수목일)

2) 추사고택을 찾아서.

오전 9시 30분 경 '의좋은 형제' 공원 앞에서 출발한 일행은 고불고불한 지방도로 따라 한 40분 정도 달려 10시 10분 경 추사고택 앞에 있는 넓은 주차장에 도착하는데, 주차장에는 주중의 오전이라서 그런지 매우 한가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 '추사기념관' 앞에 자리하고 있는 주차장 >

나는 고등학교 동문으로 구성하고 있는 우암회에서 2014년 7일 19일에서 부터 20일 까지 1박2일 동안 충청도를 탐방하는 과정에서 첫날에는 충남 보령시에 있는 '대천해수욕장' 에서 머물었고 둘째날에는 서산시 '해미읍성' 및 예산군 '추사고택' 을 탐방하였다.

내가 방문한 시기가 거의 9년이 경과하였지만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머물고 있는 추사 고택에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였을까 하는 궁궁증을 유발하게 만드는데, 먼저 제일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추사기념관(秋史記念館)' 으로 발길을 잡아본다.

< '추사고택' 주변의 조감도 >

추사기념관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님의 드 높은 서예 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후세에 남긴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보존 및 전시하여 추사 선생님의 다양한 면모와 위상을 재 정립하기 위하여 2008년 건립하였다고 한다.

(1) 추사기념관의 관람.

추사기념관 입구에는 황금색으로 앉아있는 추사(秋史) 동상이 자리하고 있고 그 동상 뒤편에 있는 기념관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로비를 만나는데, 로비 좌측에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부스(Booth)가 자리하고 있고 우측에는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 '추사기념관' 앞에 자리하고 있는 동상 >

< '추사기념관' 의 전경 >

먼저 전시실로 입실을 하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님의 연역이 기록되어 있는데, 추사는 1786년 6월 3일 이곳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향년 71세가 되는 1856년 10월 10일 경기도 과천에서 돌아가셨다.

<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연역 >

추사는 영의정을 지내신 '김흥경(金興慶)' 의 고손이며 영조의 부마가 되시는 월성위 '김한신(金漢藎)' 의 증손이 되고 이조판서를 지내신 '김노경(金魯敬)' 의 아들로 출생하였지만, 큰아버지가 되시는 '김노영(金魯永)' 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선생님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 서예가로써 벼슬은 병조참판 및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었는데, 당시 당쟁(黨爭)에 휘말려 제주도 및 함경도 북청에서 약 10년 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추사는 북학파의 거벽(巨擘)으로서 청나라의 고증학풍을 도입하는데, 학문으로는 경학, 금석학, 문자학, 사학,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기 까지 박통(博通)하였으며 북한산 기슭에 있는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된다는 것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 '진흥왕 순수비' 를 고증한 내용 >

특히 저서로는 완당집(阮堂集), 예당금석과안록, 실사구시설, 완당척독, 담연재시고 등이 있고, 이와 같이 넓고 깊은 학문과 천부적인 자질을 뱌탕으로 추사 선생님은 예술의 시(時), 서(書), 화(畵), 전각(篆刻) 등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다.

서도(書道)는 '추사체(秋史體)' 이라는 독자일문(獨自一門)을 열어 서예 사상에서 지고(至高)의 경지에 이루고 있는데, 작품으로는 목란도(墨蘭圖), 묵죽도(墨竹圖) 및 국보 제180호로 지정이 된 '세한도(歲寒圖)' 등을 남겼다.

< 중국과 한국와의 '서예사' 비교표 >

< 국보 제180호가 되는 '세한도' >

전시실 입구로 들어가면 추사 선생님의 성장 배경과 더불어 그의 부친 김노경을 모시고 중국을 방문하는데, 그때 추사에게 금석학과 서예를 가르킨 '옹방강 및 완원' 등 2분의 중국인 스승을 모시면서 학문을 연마한 내용을 잘 기술하고 있다.

< '추사' 선생님의 성장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중국인의 스승 '옹방강 및 완원' 만남 >

아울러 기념관 곳곳에 추사 선생님의 저서 및 서예, 현판 등의 글씨를 대면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추사 선생님의 기거하신 고택 및 학문을 연마하는 사랑채 모습 등을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추사 선생님이 쓰신 '추사체' >

< 추사 선생님이 쓴 "명선' >

< 추사 선생님이 기거한 '고택' 의 모형 >

안쪽 부스로 이동하면 추사 선생님이 제주도 유배 생활 둥안 추사체를 완성하는 과정과 더불어 국보가 되는 세한도를 그린 배경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고, 또 다른 부스에는 이러한 내용을 종합한 영상관도 함께 하고 있다.

< '제주도' 유배 생활을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 >

< 다양한 '추사체' 의 글씨 >

< '추사' 선생님이 쓴 서예 작품 >

너무나 많은 자료로 인하여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관람을 끝내고 로비로 나오는데, 로비에 상주하고 있는 관리인에게 2층의 전시실 관람 여부를 확인한 결과 현재 전시품 진열을 기획하고 있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로비 좌측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기념품을 판매하는 부스로 들어가 전시품을 구경하여 보는데, 이곳에 전시하고 있는 기념품은 대부분 내가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그림으로 구성하고 있어 빈손으로 추사기념관을 떠나기로 한다.

< 추사기념관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판매 부스' >

(2) 추사의 무덤 및 관리사 건물을 돌아보면서.

추사기념관을 벗어난 나는 기념관 오른편 야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추사의 무덤과 무덤을 관리하는 관리사 건물을 돌아보는데, 추사는 향년 71세가 되는 철종 7년(1856년) 10월 10일에 경기도 과천에서 작고하였다.

 

< 추사기념관과 고택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추사의 무덤' >

기념관 옆 야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무덤에는 그의 첫번째 부인이 되는 '한산이씨' 및 두번째의 부인이 되는 '예안이씨' 와 함께 합장으로 안치되어 있는데, 무덤 앞에는 석상과 더불어 1쌍의 망주석이 좌우로 배치하고 있다.

더불어 무덤 앞에 있는 묘비(墓碑)는 1937년 9월에 세웠는데, 그의 후손이 되시는 김승렬(金承烈) 선생님이 비문(碑文)을 짓고 또한 비문의 글씨도 썼다고 한다.

< 추사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석물 >

다시 무덤 오른편으로 이동하면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관리사(管理舍)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문 입구에 이곳은 관리인이 거주하는 공간이라 출입을 금지시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 무덤을 관리하고 있는 '관리사' 건물 >

또 다시 관리사 건물의 우측편으로 이동하면 한기의 우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아기는 어머니 배 속에서 10개월 만에 출생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추사의 어머니 유씨는 24개월 만에 추사를 낳았다고 한다.

< 관리사 옆애 자리하고 있는 '우물' >

추사를 임신하고 있을 때 이곳 우물이 갑자기 마르고 마을 뒤편 팔봉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고 하는데, 추사가 탄생하고 나서 부터 다시 우물의 물이 솟았고 나무들도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3) 추사고택의 방문.

이곳 우물 오른편으로 추사 선생님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는데,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면서 영조대왕의 부마가 되시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 께서 1700년 대 중반에 100여 평 부지 위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 선생님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몇 단의 돌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바로 사랑채에 도착하는데, 사랑채의 남쪽에는 1칸의 방 있고 동쪽에는 2칸의 온돌방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대청과 마루가 있는 'ㄱ' 자 형태의 집으로 건립되어 있다.

< '추사고택' 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 추사고택의 '사랑채' >

< 사랑채 문틀 위에 쓰여 있는 '죽로지실(竹爐之室)' >

사랑채 앞에 있는 정원에 돌기둥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돌기둥에는 해시계의 받침대로 사용하였으며 돌 기둥 전면에 '석년(石年)' 이라는 글씨는 추사 선생님의 아들이 되는 '김상우(金商佑)' 가 추사체로 쓴 것을 각자한 것이라고 한다.

< 사랑채 앞 '석년' 이라고 쓰여 있는 돌 기둥 >

사랑채에서 나와 뒤편으로 돌아서 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문을 통과하여 안채 마당으로 들어서면 안채의 구조는 'ㅁ' 자 형태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는 6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 및 건너방이 자리하고 있다.

 

< 사랑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안채' >

건물에는 안방, 건너방의 부엌, 안대문, 협문, 광 등이 빙돌아서 건축되어 있는데, 그로 인하여 안채 내부로 바람 한점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ㅁ자 형태의 건물이 되어 매우 포근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ㅁ' 자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안채 내부 >

이곳 안체에서 남쪽 방향으로 나가는 협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와 안채 뒤편으로 돌아가 올라가면 추사 선생님의 '영정(影幀)' 을 모시고 있는 영당(影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영당 내에 모시고 있는 영정 그림은 희원 '이한철' 선생님이 그린 그림이라 한다.

< 안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영당' 건물 >

< 희원 '이한철' 화벽이 그린 추사 선생님의 초상화 >

(4) 화순옹주 무덤 및 홍문을 구경하면서.

추사 고택을 관람하고 나서 밖으로 나와 오른편 방향에 있는 소나무 숲을 지나면 야산 기슭에 무덤 한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무덤이 추사 선생님의 증조부가 되시는 '김한신' 과 그의 부인 '화순옹주(和順翁主)' 의 합장 묘소이다.

 

< 추사고택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김한신 및 화순옹주' 무덤 >

묘소에는 돌 담장으로 둘려쌓여 있으면서 무덤의 앞에는 문인석 1쌍과 망주석 1쌍 및 장면등 한기와 더불어 묘석이 구비되어 있는데, 장명등 오른편으로 비문 한기가 서 있으면서 이 비문은 영조대왕이 쓴 어필이 새겨져 있다.

 

< 증조부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석물' >

묘소 앞으로 2 그루의 백송(白松)이 자라고 있는데, 왼편에 있는 백송은 많이 성장하므로 인하여 씩씩한 소나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오른편에 있는 백송은 아직 미숙하여 줄기에 완벽한 흰색을 띄지 못하고 있다.

 

< 증조부 무덤 앞에 자라고 있는 '백송' >

묘소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8칸의 솟을대문을 가진 정려문(旌閭門)을 만나는데, 이곳 정려문은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홍문(紅門)으로 입구 현판에는 화순옹주의 열녀를 기리는 현판이 붙어있다.

< '화순옹주' 를 기리는 정려문 >

영조는 2명의 아들과 12명의 옹주(翁主)를 생산하였지만 자식에 대한 복(福)이 없어 그런지 한명의 아들은 일찍 죽고, 정조의 아버지가 되는 사도세자가 탄생하므로 너무나 기뻐 바로 세자로 책봉하였지만 잘못된 당쟁의 산실로 뒤주 속에서 죽음을 가지도록 방치한다.

그러고 12명의 옹주도 대부분 일찍 죽음으로 인하여 3명의 옹주만 살았는데, 그 중에서 화순옹주는 영조의 차녀(次女)로써 추사 선생님의 증조 할머니가 되지만 화순옹주도 지아비 월성위 김한신이 3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옹주는 식음을 전폐하고 지아비 따라 죽음을 선택한다.

 

< 정려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의 '주축돌' >

그래서 영조가 아무리 만류를 하였지만 아버지 령(令)을 어기고 죽음을 선택하므로 이에 격분한 영조는 아쉬움 때문에 열녀 정문을 내리지 않았지만 후대가 되는 정조임금이 고모가 되시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열녀문(烈女門)을 내리는데,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가 된다.

(5) 예산 백송조각공원을 거닐면서.

화순옹주 정려문 옆으로 예산 '백송조각공원(白松彫刻公園)' 이 조성되어져 있는데, 이곳 조각공원 내에는 수 많은 백송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며 그 백송나무 사이로 시비(詩碑)`와 함께 다양한 조각품을 전시하고 있다.

< 화순옹주 정려문 옆에 만들어져 있는 '백송공원' >

< '백송' 과 함께 서 있는 시비 >

일반적으로 어린 백송은 줄기가 다소 붉은 색을 띄고 있다가 수십년의 연륜(年輪)을 지나면서 차츰차츰 줄기와 나무가지 까지 흰색으로 변하는데, 이곳 추사고택에서 보유하고 있는 백송단지는 정말 대면하기 어려운 공원이라 하겠다.

 

 

< 추사 선생님이 그린 '난초' >

 

< 백송과 함께 하고 있는 '시비' >

< 추사 선생님의 글씨 '명선' >

<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조각품' >

조각공원의 가장자리에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백송의 현황을 사진과 함께 기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오래된 백송은 서울 헌법재판소 뜰에서 자라고 있는 수령 약 600년이 된 백송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백송' >

이곳 백송조각공원에서 부터 오른편으로 5분 거리에 추사 선생님의 고조부가 되시는 '김홍경' 선생님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무덤 앞에 수령 200여 년이 되면서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된 백송 한그루가 자라고 있다.

< 추사 선생님 '고조부' 무덤 앞에 있는 백송 이야기 >

나는 2014년 7월 20일 추사고택 방문 때 승용차를 이용하여 고조부 무덤 까지 찾아가 백송을 구경하였지만, 오늘은 그 보다 오래된 백송 사진을 보고 관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재차 방문을 생략하고 추사고택을 떠나기로 한다. - 둘째날 2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