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충청)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자리하고 있는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을 돌아보면서.(6)

용암2000 2023. 9. 15. 20:45

2023년 9월 6-8일.(2박3일)

2. 둘째날 : 9월 7일.(목요일)

3)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돌아보면서.

충남 예산군이 자랑하는 수덕사를 구경하자는 의견 일치로 인하여 추사고택을 떠난 일행은 수덕사로 들어가는 길 초입에 있는 매헌(梅軒)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 기념관도 함께 돌아보기로 한다.

추사고택에서 다시 고불고불한 지방도로 따라 한 40분 정도 달려 11시 40분 경 윤봉길의사 기념관 앞에 있는 대형 주차장에 도착하는데, 이곳도 주중의 오전이라 그런지 적믹감만 내리도 있다.

여기도 고등학교 동문으로 구성하고 있는 우암회에서 2011년 8일 6일에서 부터 7일 까지 1박2일 동안 충청도를 탐방하였는데, 그때 탐방하는 과정에서 첫날에는 예산군에 있는 '수덕사' 및 서산시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 및 '개심사' 를 구경하였다.

둘째날에 다시 예산군으로 넘어와 예산군에 있는 '덕산온천욕' 과 더불어 '윤봉길의사 기념관' 및 '보부상 유품 전시관' 등 유적지를 탐방하였고, 삽교천으로 올라가 삽교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한 식당에서 점심식사 시간을 가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었다.

이곳 윤봉길의사 기념관도 내가 방문한 시기에서 부터 12년이라는 긴 시간의 경과로 인하여 내용 하나도 기억할 수 없어 새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는데, 그떄 있었던 보부상 유품전시관이 보이지가 않는다.

(1) 유봉길의사 기념관의 관람

많은 태극기가 도열하고 있는 길 따라 내부로 들어가 보는데, 기념관 입구로 들어서면 로비 뒤편으로 윤봉길의사가 집을 떠나면서 쓴 '장부출가생불환(丈父出家生不還)' 이라는 글씨가 나의 가슴을 멍하게 만든다.

< '윤봉길의시 기념관' 으로 들어가는 길 >

< '윤봉길의사 기념관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 '어록탑' >

< 로비 뒤편에 부착하고 있는 '윤봉길의사' 의 글 >

안내실 오른편으로 화장실로 들어가는 복도와 더불어 전시실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출입문을 통과하면 이내 영상물로 윤봉길의사의 연역을 설명하고 있다.

 

< '전시실' 내부의 조감도 >

<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부착하고 있는 '그림' >

윤봉길의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 및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공부하였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夜學)을 세워 농촌계몽 운동을 시작하였다.

< '윤봉길의사' 전시실 입구에 있는 조형물 >

또한 윤봉길의사는 고려시대의 명장이 되시는 '윤관' 장군의 후손으로 그의 아명은 윤우의(尹禹儀)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며 봉길은 중국으로 떠날 때 스스로 지은 이름이라 한다.

그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광현당(光顯堂)에서 태어나 4세 때에 관현당과 인접하게 있는 저한당(抯韓堂)으로 옮겨와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독립운동가이면서 교육자, 시인 및 저술가이라 하겠다.

20세 때 각곡 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 을 편찬했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하지만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가 어려워지자 1930년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김구선생이 운영하고 있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 '윤봉길의사' 가 태어난 덕산면 시량리의 어린시절 그림 >

< '농민운동' 을 하고 있는 자료 >

< '계몽사상' 을 가르키는 윤봉길의사 >

안쪽 부스로 이동하면 윤봉길의사와 백범 '김구(金九)' 선생님과 만남과 동시에 독립운동에 매진하겠다는 충성 명세하는 내용들을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윤봉길의사의 회중시계와 김구선생님이 착용한 회중시계와 교환을 한다.

< '김구' 선생님과의 만남 >

그 뒤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가 2만여 명의 일본인들이 모여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 기념회를 열고 있는 상해 홍구공원(현재 : 루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수십명의 일본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 흥구공원에서 '폭탄' 을 투척하고 있는 윤봉길의사 >

이곳 전시실의 한쪽 구석자리에 도시락와 수통 폭탄 및 회중시계를 전시하고 있는데, 투척 당시에 도시락 폭탄은 사용하지 못하고 수통 폭탄만 투척하였다고 한다.

< 윤봉길의사가 사용한 '도시락 및 수통' 폭탄 >

김구 선생님으로 부터 받는 회중시계는 지름이 5Cm에 줄 길이가 30Cm 및 시계의 두께가 1Cm 정도가 되는 스위스 제(製) 시계인데, 현재 이 시계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져 있다.

< 김구 선생님으로 부터 받는 '회중시계(보물 제568-2호)' >

하지만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의사는 군법재판 단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일본으로 압송되어 오사카(대판 : 大阪) 형무소에서 잠깐 수감되었다가 가나자와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24살의 나이로 총살을 당한다.

< '윤봉길의사' 가 체포되어 압송 당하는 길 >

< 거룩하게 '순국' 을 한 윤봉길의사 >

< '유해' 로 조국으로 돌아온 사연 >

전시실 내부로 들어가면 유봉길의사 일대기를 비롯하여 그가 소장한 각종 서류와 서책 및 계몽활동 때 학생들을 가르켰던 내용들을 디오라마(Diorama) 식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데, 그의 활동상을 이해하기에 너무나 쉽게 만들어져 있다.

< 전시하고 있는 각종 '책과 소품' >

< 전세계로 펴져나가고 있는 '의거' 사건 >

< 국가에서 내린 '훈장' >

다른 한편으로 윤봉길의 폭탄 투척에 부상을 입은 '시게미쓰 마모루' 가 세계 2차대전에 대하여 전범을 인정하면서, 미군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사진도 전시하고 있다.

 

< 폭탄 투척으로 부상을 당한 '시게미쓰 마모루' 가 전범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장면 >

 

전시실 중앙에 형틀대를 전시하고 있는데, 이 형틀대는 윤봉길의사가 총살을 당할 때 양팔을 묶은 가로막 나무 막대기 형틀대로 이것도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고 한다.

 

< 가로막 나무 막대기로 만든 '형틀대(보물 제568-3호)' >​

 

각 부스마다 윤봉길의사의 항일 운동에 대한 선구적 역활을 하고 있는 내용들이 일목요약하게 전시하고 있지만, 이곳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을 관람을 끝내고 주차장과 인접하게 자리하고 있는 '충의사(忠義祀)' 를 돌아보기로 한다.

<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포토존' >

< 역사 저널 '그날' 에서 윤봉길의사를 설명하고 있는 아나운서 >

 

< 실내에 만들어져 있는 '윤봉길의사' 흉상 >

< '기념품' 을 판매하고 있는 부스 >

(2) 충의사의 탐방.

주차장에서 정면으로 바로 올라가면 윤봉길의사 사적비 한기와 함께 옆으로 만들어져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충의사(忠義祀)' 영역을 포시하고 있는 홍살문아 자리하고 있고, 홍살문을 지나 또 다시 일단의 계단으로 올라서면 충의문(忠義門)을 만난다.

< 충의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서 있는 '윤봉길의사 사적비' >

< '충의사 ' 입구에 있는 홍살문 >

< 충의사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충의문' >

충의문을 통과하면 '윤봉길의사' 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충의사 건물을 만나면서 건물 내부에는 향불을 피우는 향로를 비롯하여 앉아있는 윤보길의사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간단하게 묵념으로써 예(禮)를 올리고 충의사를 떠나기로 한다.

 

< 윤봉길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의사' >

< 충의사 내에 모시고 있는 윤봉길의사 '영정' >

(3) 저한당을 돌아보면서.

윤봉길의사 기념관 앞으로 만들어져 있는 넓은 도로 건너편으로 넘어 숲속으로 조금 들어가면 윤봉길의사가 생활한 저한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저한당으로 들어가는 후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넓은 광장을 만난다.

< '저한당' 으로 들어가는 후문 >

< '저한당'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광장 중앙길 따라 조금 들어가면 오른편에는 윤봉길의사의 동상이 서 있고 그 동상 옆으로 윤봉길의사 의거 기념탑도 함께 서 있는데, 이곳 동상과 기념탑이 자리하고 있는 앞쪽에 윤봉길의사가 살았던 저한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저한당 광장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윤봉길의사' 동상 >

 

< 윤봉길의사 동상 옆에 만들어져 있는 '의거 기념탑' >

저한당 건물은 사방으로 담장으로 구획하면서 당장 중앙에 문간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문간채를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ㅁ' 자 형태의 안채와 사랑채 및 곡간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윤봉길의사는 이곳에서 4살 때 부터 중국으로 떠날 때 까지 살았다고 한다..

< 저한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문간채' >

< 'ㅁ' 자 형태로 지어져 있는 저한당 >

< 저한당의 '안채' >

저한당 건물 앞으로 흐르고 있는 개울 건너편에 도중도가 자리하고 있는데, 도중도 내 윤봉길의사가 출생한 광현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까지 갔다오기에 다소 먼 거리가 되는데, 그래서 탐방을 생략하고 윤봉길 기념관을 떠나가로 한다. - 둘째날 3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