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대구)

대구 팔공산 지맥 중 하나인 왕산에 자리잡고 있는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찾아서.

용암2000 2023. 9. 24. 09:23

2023년 9월 22일.(금요일)

*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대구 엑스코에서 개최하는 '2023 경향하우징 페이 박람회' 장을 떠난 일행은 대구 엑스코에서 인접하게 있는 팔공산 방향으로 드라이브를 즐기기로 한다.

또한 팔공산 언저리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문 중 한명에게 전화를 거니 현재 집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함께 만남의 시간을 가지도록 한다.

동문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신숭겸(申崇謙)' 장군의 유적지(遺跡地) 입구에서 만남을 가지도록 하는데, 이왕 유적지 입구에서 만나므로 인하여 유적지 내부를 돌아보기로 한다.

< '신숭겸' 유적지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홍살문 >

나는 2011년 4월 14일에 이곳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탐방하여 나의 블로그에 이미 기술한 경험이 있는 유적지이라 탐방한 내용을 간단하게 기술하기로 하는데, 유적지가 너무나 넓어 유적지 내에 대형 버스 및 소형 승용차 주차장이 함께 하고 있다.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있으니까 동문이 도착하므로 함께 유적지를 탐방하기로 하는데, 대구는 남쪽으로 해발 1.084m 비슬산과 북쪽으로 해발 1.192m 팔공산이 자리하고 있다.

팔공산과 비슬산 사이에 있는 넓은 분지 속에 대구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로 인하여 여름철이면 한국에서 제일 더운 지역의 도시가 된다.

그 중에서 우리의 역사에서 반듯히 기록되고 있는 고려의 창건 역사를 말하는 태조 '왕건' 의 흔적이 팔공산과 비슬산 언저리에 많은 실화를 간직하고 있는데, 대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곳으로 여행하여도 왕건의 발자취를 대면하여 진다.

'왕건(王建)과 견훤(甄萱)' 과의 싸움이 있었던 공산전투(公山戰鬪)가 팔공산 지맥이 되는 '왕산(王山)' 기슭에서 발생하는데, 그 싸움에서 왕건을 대신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장절공 '신숭겸(申崇謙)' 장군 유적지가 지금 일행이 머물고 있는 이곳이다.

이렇게 신숭겸 유적지가 사람들의 접근이 매우 쉬운 대구시가지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곳의 유적지가 외부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신숭겸 장군은 '평산신씨(平山申氏)' 의 시조로써 신라말 전라도 곡성현에서 태어나 기골이 장대하고 천성적으로 용맹 스러웠는데, 특히 활을 잘 쏘고 무예가 탁월하여 매우 뛰어난 장수의 자질을 겸비한 장군이라고 한다.

장군은 서기 918년 6월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후고구려를 개국한 폭군 '궁예(弓裔)' 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받들어서 '고려(高麗)' 를 창건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태조 10년(927년) 가을철 장군은 왕건과 함께 신라를 치고 돌아가는 후백제 견훤을 팔공산 언저리에서 맞아 싸웠으나 후백제 군에게 포위되어 위기를 직면하게 된다.

이 때 절대 절명적 상황에 있는 왕건을 숨기고 자신이 왕건의 옷을 입고서 싸움하다가 이곳 왕산 기슭에서 김락(金樂) 장군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다.

왕건은 단지 몇 명의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뒤편 왕산으로 피신하면서 밤새도록 걸어 대구 외곽지가 되는 파군재와 반야월 및 안심 방향으로 돌아 대구 앞산에 숨어 들어간다.

대구 앞산에 있는 '은적사 및 안일사' 에서 잠시 머물면서 견훤의 동태를 살피면서 고령 방향으로 도주하여 합천에서 우군을 만나 기사회생하는 절대위기를 꺽는다.

그 후 팔공산에서 전사한 신숭겸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는 후백제 군이 가져가 버리므로 인하여, 몸통만 수습하여 시신을 강원도 춘천시에 묻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이 신숭겸의 머리와 동일한 크기의 황금으로 만들어 매장하라는 지시로 황금 얼굴을 넣었다는 설이 있고, 또한 도굴에 대비하는 특수 매장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간직한 신숭겸 장군 유적지는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공산댐 아래 파군재 근교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위에는 높은 아파트 단지로 둘려 쌓여있어 들어가는 출입구를 찾기가 다소 난이하게 만든다.

대구시에서 관람을 무료로 개방하여도 유적지를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고 단지 아파트 내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전락하고 있는데, 오늘도 단지 몇 명의 마을 주민들이 여가를 즐기고 있다.

입문 우측편으로 들어가면 안내 지도와 더불어 그 뒤편으로 '순절단(殉節壇)' 으로 들어가는 작은 쪽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순절단이 만들어진 장소가 신숭겸 장군이 전사한 장소이라고 한다.

< '순절단' 을 알리는 안내문 >

순절단 옆과 뒤편으로 수령이 약 400년이나 된 고목의 배롱나무 몇 그루가 자리하면서 많은 꽃을 피우고 있는데, 이 배롱나무 이름을 '신숭겸장군 나무' 이라고 이름표를 부착하고 있다.

 

< 순절단 옆에서 자라고 있는 '배롱나무' >

< 순절단 뒤편에서 자라고 있는 '배롱나무 >

< 수령 400년이 되는 신숭겸장군의 '배롱나무' >

순절단은 신숭겸 장군과 김락 장군이 전사한 장소를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 및 외손들이 1.35m 까지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놓아 전체 높이가 1.8m가 되면서 4각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 돌로 쌓은 '순절단' >

순절단 앞 오른편에 '고려장절신공순절지지비(高麗壯節申公殉節地之碑)' 이라는 비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순절지지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건물의 둘레로 만들어진 창살로 인하여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읽기가 쉽지 않게 만든다.

< 순절단 앞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비각' >

순절단을 나와 넓은 마당 뒤편으로 들어가면 하늘로 높게 치솟고 있는 말을 탄 '신숭겸'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데, 그의 손에는 활을 허공을 견주면서 약진하고 있는 모습이 장군의 폐기가 서려있게 한다.

< 활을 쏘고 있는 '신숭겸' 장군 >

신숭겸 장군이 왕건과 같이 평주 삼탄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아갔다가 날아가는 3마리 기러기를 보고 왕건이 지적하는 기러기 날개를 쏫아 떨어뜨려 크게 칭찬을 받았는데, 그래서 이곳 동상이 활을 쏘는 모습이라 하겠다.

그래서 '평주(平州 : 평산)' 이라는 본관(本貫)과 더불어 많은 토지를 하사 받았는데, 그 후로 신숭겸 장군은 '평산신씨(平山申氏)' 의 시조(始祖)가 되었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

동상 뒤편으로 신숭겸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표충사(表忠祠)' 사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하지만 표충사로 들어가는 정문 '충렬문(忠烈門)' 이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충렬문' >

< 충렬문 앞에 만들어져 있는 '포토존' >

충렬문의 높은 담장 따라 오른편 산책길로 걷다 보면 수령 400년 정도가 되는 '팽나무' 한그루를 만나는데, 이 나무 이름을 '왕건나무' 로 명명하였다는 이름표가 붙어있지만 왕건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상징적 나무이라 하겠다.

 

< 수령 약 400년이 되는 '팽나무' >

< 태조 '왕건나무' 로 명명한 사유 >

팽나무에서 옆으로 나아가면 전사청(典祀廳)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 신숭겸 장군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림 내용을 정독하면서 신숭겸 장군의 삶을 선명하게 알게하여 준다.

< 사당 옆에 자리하고 있는 '전사청' 건물 >

< 전사청 옆 '신숭겸' 장군의 일대기를 표현하고 있는 그림 >

< '일대기' 를 기술하고 있는 그림 >

일전이도 다소 늦게 방문하여 충렬문이 닫혀 있어 표충사를 관람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오늘은 관람시간 내에 방문을 하였지만 대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매우 실망감을 갖게 하는 유적지가 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