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여행 및 산행.(경기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있는 '화개공원 및 연산군 유배지' 를 구경하면서.(5)

용암2000 2023. 11. 16. 09:04

2023년 11월 8-9일.(1박2일)

2. 둘째날 : 11월 9일.(목요일)

2) 화개공원을 구경하면서.

교동도에 자리하고 있는 망향대에서 출발한 일행은 섬의 외곽도로 따라 10여 분 정도 달려가면 해발 259m '화개산(華蓋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화개공원에 도착하는데, 화개공원은 최근 교동도가 야심차게 개발하고 있는 공원이다.

화개산은 교동도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는 산으로 산의 정상에 전망대를 설치하므로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 및 북녘 땅에 흐르는 예성강이 한 눈에 들어오고 있는데, 최근 산의 정상 까지 모노레일을 설치하여 남여노소(男女老少)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곳이다.

공원 입구에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면서 각 주차장 마다 많은 차량들이 주차하고 있는데, 일행은 많은 차량으로 인하여 제일 먼거리에 주차하고 나서 천천히 걸어 공원 입구로 올라가 본다.

< '화개공원'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주차장 >

< '화개공원' 으로 올라가는 길 >

이곳 화개공원은 화개산 일원에 약 7만여 평(21만3250㎡)에 민간 사업자가 자금을 투입하여 '화개정원' 을 조성하였는데,공원 관람료는 성인 5.000원을 징수하고 있지만 경로 또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3.000원을 받고 있다.

 
 

< '관람료' 를 징수하고 있는 매표소 >

< '화개정원' 을 나타내고 있는 안내판 >

관람료를 지불하고 나서 내부로 조금 올라가면 왼편으로 모노레일을 탑승하는 3층 건물의 승강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모노레일 탑승료는 공원 관람료와 별도로 왕복 12.000원을 징수하고 있지만 너무나 많은 관광객으로 인하여 거의 2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 '모노레일' 을 탑승할 수 있는 승강장 >

< '모노레일' 을 탑승하고 있는 관광객 >

일행은 그렇게 기다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탑승을 포기하고 공원만 돌아보기로 하는데, 현재는 가을철 꽃이라고 하는 국화 계절이라서 그런지 공원 곳곳에 국화 축제를 함께 개최하므로 더욱더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공원이다.

< '사랑' 한다고 표시하고 있는 국화 >

< 거대한 '자전거' 를 탑승하고 있는 거인 >

< 정원에서 노닐고 있는 '사슴' >

< 국화로 장식하고 있는 '포토존' >

< '풍차' 모양의 조형물 >

산의 비탈면 따라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는 공원으로 올라가면 공원 가장자리 따라 모노레일이 연속적으로 관광객들을 싣고 전망대로 올라가는데, 산의 정상부 형태가 '솥뚜껑을 덮어 놓은 것 같다' 하여 '덮을 개(蓋)자' 를 써서 화개산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 산의 비탈면 따라 단계로 만들어져 있는 '화개정원' 전경 >

< 산의 정상에 만들어져 있는 '전망대' >

<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모노레일 카' >

공원의 중앙으로 올라가면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폭군 '연산군 유배지(燕山君 流配地)' 가 만들어져 있는데, 강화도 및 교동도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왕(王) 또는 왕족(王族)들의 유배지로 많이 사용한 지역이다.

< '연산군 유배지' 를 알리고 있는 입석 >

고려시대에는 희종(21대), 강종(22대), 충정왕(30대). 우왕(32대). 창왕(33대) 등의 왕과 조선시대에서는 폐위된 연산군(제10대), 광해군(제15대)을 비롯하여 왕족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군, 경안군 등 1,000여 년 동안 왕과 왕족들이 유배가 되었다.

< 고려시대 '강화도' 로 유배된 왕 >

< 조선시대 '교동도' 의 현황 >

 

< 조선시대 '교동도' 로 유배된 왕과 왕족 >

이 처럼 강화도와 교동도가 왕과 왕족의 유배지로 이용된 이유는 한양과 가까운 지역의 섬으로써 격리와 감시가 쉬웠기 때문인데, 왕과 왕족의 유배생활 동안 다른 사람의 만남이 제힌되었고 또한 글을 쓰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하였다.

공원 중앙에는 초가로 지어진 교동도 '유배문화관(流配文化館)' 이 만들어져 있는데, 문화관 내부로 입실하여 보면 이곳 강화도 및 교동도가 유배지로 사용한 내역을 비롯하여 연산군의 유배생활을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 초가로 지어진 '유배문화관' >

< '연산군 유배지'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유배문화관' 의 내부 전경 >

< '유배형' 의 종류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특히 연산군은 성종의 장자이자 폐비(廢妃) 윤씨의 아들로 성종 7년(1476년)에 출생하였는데, 성종 14년(1483년)에 세자로 책봉이 되었지만 어머니의 폐비로 인하여 계모 정현왕후의 아들로 성장하였다.

18살(1494년)에 왕으로 즉위한 연산군은 초기에는 국조보감 및 여지승람 등을 완성하면서 다수의 업적을 쌓았지만, 즉위 이듬해 부터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권시키는 일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선왕이 되시는 성종이 '사후 100년 간 폐비 윤씨 문제는 논외에 부친다' 라고 하는 유언을 이유로 들어 폐비 복권에 반대하므로 감정이 악화된 연산군은 사림파(士林派)의 제거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연산군 4년(1498년)에 무오사화(戊午士禍) 및 10년(1504년)에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수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부관참시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연산군 12년(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中宗反正)' 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 교동도로 유배가 된 '연산군' 의 삶 >

< 연산군 시대에 일어난 '사화' >

그후 조정에서는 연산군의 이복동생이 되는 진성대군(중종)을 왕의 자리에 앉혔는데, 중종(中宗)은 왕위에 오르기 전 신하들에게 연산군을 죽이지 말도록 명령하면서 교동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를 시켰다.

< '위리안치' 가 되고 있는 연산군 >

< '연산군' 의 유배 일정 >

< 위리안치가 된 '집' >

하지만 연산군은 이곳 교동도로 위리안치가 된 후 역질에 걸려 물도 마시지 못하고 눈도 뜨지 못하다가 그해 11월 8일에 죽었는데, 연산군은 교동도로 유배된지 약 2개월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마당 가장자리에 연산군이 소 달구지를 타고 유배하고 있는 모습과 더불어 매우 작은 방에서 밥상을 받고 있는 모습의 '디오라마(Diorama)' 모형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살았던 왕이 2개월 만에 죽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는다.

< 밥상을 받고 있는 '연산군' >

< 계단 위에서 내려보는 '연산군 유배지' 전경 >

연산군 유배지를 구경하고 나서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다양한 조형물과 더불어 꽃을 심은 정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민간 업자들이 운영하는 공원이라서 그런지 매우 다양 함을 가진 공원이라 하겠다.

< 일단의 계단 위에서 바라보는 '전망대' >

< 일단의 계단 위에서 내려보는 '화개정원' 전경 >

< 공원 내에 만들어져 있는 '돌탑' >

< 곳곳에 만들어져 있는 '화원' >

< 거대한 '고목' 의 뿌리 >

< 화개산을 표시하고 있는 '솥뚜껑' >

12시 40분 까지 공원에 머물면서 다양한 꽃과 조형물을 구경하다가 다음 관광지가 되는 대룡시장을 구경하기로 하는데, 대룡시장은 교동도 중심지가 되는 면사무소 내에 자리하고 재래시장이다.- 둘째날 2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