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일기.

새로운 며느리와 함께 나의 고향에 잠들고 있는 부모님 "묘소" 를 찾아 인사 올린다.

용암2000 2011. 5. 16. 17:17

 

2011년 5월 15일 (일요일)

신혼여행을 마치고 인사하려 온 며느리 및 가족 전부를 대동하고,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 방문과 더불어 부모님이 잠들고 있는 선산을 찾아 인사를 드릴려고 나들이 길을 나선다.

나의 고향은 내가 살고 있는 대구시에서 조금 떨어진 경북 성주군 용암면 마월동이며 고향에는 년세(年歲)가 높아 나의 아들의 결혼식 까지 장거리 거동이 불편하신 5촌 종 백숙 부모님과 7촌 재종 백숙 부모님이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데, 먼저 집으로 들어가 집안 어르신에게 인사를 시켜 드린다.

 

< 아직도 집안 친척이 살고 있는 나의 "고향" 마을 >

 

이어 나의 부모님이 계시는 무덤으로 찾아 가는데, 부모님 무덤은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용암면 근교에서 제일 높은 해발 556m "성암산" 6-7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등산객 보다 더 완전 무장이 이루어져야만 올라 갈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 까지 평상시 1년에 한번 벌초 때 만 겨우 찾아가는 불효의 무덤 길이라 하겠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도 비록 성암산과는 다소 많이 떨어져 있지만 성암(聖岩)이라는 글짜를 사용하여 "성암초등학교" 로 불려지고 있고, 또한 성암산 산기슭 일부분이 되는 약 일만 오천평 정도 나의 산이 존재하고 있는 성주군의 명산이다.

고향 마을을 통과하여 마을의 제일 위쪽 산자락 까지 올라가면 아담한 "두무지" 라는 저수지 하나가 만나는데, 이곳 저수지는 내가 사회 생활을 한참 할 때 약 30여 년 전 만들어진 저수지로써 깊고 파란물이 담겨있는 저수지 중앙에 내가 태어난 집터가 물 속에 잠들고 있다.

 

< 나의 집이 수몰되어 있는 "두무지" 모습 >

 

저수지를 형성하고 있는 물이 너무나 맑고 차가워 산천어를 제외한 어떠한 고기도 서식하지 못 할 정도의 청정지역을 유지하고 있는데, 낚시꾼 한 명도 없는 한국에서 최고로 맑은 물을 간직한 저수지이다. 

 

< 맑고 차가운 물로 가득한 "저수지" 전경 >

 

이곳 저수지 대부분 땅은 나의 증조 할아버지 때 부터 여기로 들어와 할아버지와 아버지 6형제가 살았던 고향의 터전이고 내가 태어나 성장하면서 대학교를 졸업 할 때 까지 살았는 집이 있었던 장소이지만, 이제는 영원히 물 속으로 수몰되므로 이북의 실향민과 같이 향수가 아련히 일어나는 장소이다.

저수지 둑에 앉자 물 속에 잠자고 있는 나의 집 터 위치와 성장 과정을 설명하면서 옛 향수를 그려보지만, 영원히 원상 회복이 불가능 함이 너무나 가슴 아파온다.

우리집 Wife가 시집을 와서 처음 이곳에서 시어른에게 인사하고 몇일 밤 머물고 있을 때의 추억을 며느리에게 전하는데, 도시에서 성정한 Wife가 그때 까지 세상에서 이렇게 지독한 오지의 산 골짜기가 존재한다는 것 처음 대면하였다.

어둠이 내리는 밤에는 곳곳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풀 벌레 소리를 처음 대면한다고 하면서, 밤에 재래식 변소가 되는 뒷간에도 가지 못한 체 고통의 시간으로 나날을 보낸 그때 경험의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의 추억으로 되살아 난다.   

깊은 골짜기로 이어지는 산골로 들어가 산 모퉁이 하나를 돌아서 가면 조그마한 연못이 하나가 더 있는데, 아래 큰 저수지가 만들기 전 이 연못이 우리 마을에 농업의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용수를 저장한 못으로써 어릴적 소를 먹이면서 물놀이 하는 천연 수영장이다.

 

< 어릴적 나의 전용 풀장이 되는 작은 "연못" >

 

하루 종일 맨몸으로 물 속에 머물면서 배운 수영 실력이 아직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그래서 지금 물 속에 들어가도 맥주병이 되지 않고 물 위로 뜨면서 수영이 가능하도록 한 은혜의 연못이다.

이제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다 보니 상부에서 내려오는 작은 토사와 나무 찌꺼기가 모여서 연못의 대부분이 메워져 흔적만 남아 있는 추억의 연못이 된다.    

이 연못을 기점으로 자연 생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청정지역을 통과하여 급경사의 길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내 땀으로 번벅이 되면서 곳곳에 산짐승의 발자국과 더불어 배설물이 산재하고 있어 머리에 긴장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 원시림 수목으로 형성되어져 있는 산길로 올라가고 있는 "가족" >

 

몇년 전 산에 자라는 울창한 수목의 갱신을 위하여 지방자치단체에서 벌목을 하였는데, 그래서 길에는 나무의 잔가지와 땅가시 넝쿨로 인하여 완전히 길이 막혀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이 캄캄한 숲속으로 기면서 올라가야 하는 곤역의 길이 된다.   

몇 번의 휴식을 취하면서 한참 올라가면 대나무 숲을 형성하고 있는 군락지에 도착하는데, 이곳이 나의 어린시절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던 화전민의 집터이다.

 

< 올라가다가 지쳐 "휴식" 을 취하면서 >

 

이렇게 높은 곳에 사람이 생활한 이유는 6.25 전쟁 때 마을의 모든 사람들과 일부 성주 군민들이 이곳으로 피난하면서 생활 한 곳인데, 그 이후 모든 사람들은 마을로 돌아갔으나 한 가옥만이 수십년 간 그곳에 머물면서 살고 있는 집터이다.

집터를 경계로 조그마한 도랑을 건너면 나의 산으로 들어가는데, 야산 하나를 더 올라가 성암산 7부 능선에 도달하면 아담한 2기의 쌍봉 무덤이 나타나면서 여기가 나의 부모님이 잠들고 있는 무덤이다.

 

< 나의 부모님이 잠들고 있는 "무덤" >

 

무덤 앞 양지바른 곳에는 나의 유년기 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경주 불국사의 말사가 되는 "두무사" 라는 사찰이 있었지만,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몇년 전 어느 독지자가 사비를 출연하여 사찰을 복원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지만, 경제적 효과의 미흡한지 Cancel 되었다는 후문이 나돌고 있다.

무덤 앞에 서서 주위 조망을 구경하여 보면 좌청룡과 우백호의 높은 지맥이 양쪽으로 마을 까지 도열하고 있고,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면 낙동강의 흰백사장이 뱀과 같이 흘려가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대구 화원방향의 아파트 건물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부모님 무덤에서 뒤편 능선으로 조금 만 더 올라가 성암산 정상에 서면 영남의 명산 "가야산" 이 눈 앞에 머물고 있지만, 지금은 성암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완전하게 차단되어 무덤 가에 앉자 상상의 설명으로 나의 경험을 대신한다.

이렇게 높은 곳에 무덤을 만든 이유는 나의 어린 시절 우리 고향에서 최고 명당에 부모님 산소를 모셨다고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일년에 한번도 찾아오지 못하는 불효의 장소가 되어짐을 아들과 며느리에게 이야기 할려고 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외동인 내가 혼자 더 이상 이곳 까지 올라오지 못 함을 설명하여 주는데, 오늘 직접 경험을 통하여 시 할아버지 및 할머니 묘소에 혼자 찾아 성묘하는 것이 불가능 함을 알게하여 준다.

그래서 최근 나의 친척과 협의하여 마을 인접에 있는 종중 밭으로 일가 친척의 모든 무덤을 일괄 이장을 추진하겠다는 과정을 첨언하면서 설명하여 준다.

몇년 전까지만 하여도 나의 부모님 산소 주변에 몇 기의 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두가 이장하여 몇 기만 남아 있는 후손들과 이야기도 하여 보지만 그분들도 이제는 이장이 불가피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도시에서 성장한 아들에게 만약 내게 무슨 변고가 발생한다면 나를 대동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이곳으로 찾아오는 길이 전연 불가능한데, 내가 살아있을 때 얼굴도 모르는 선조(先祖)의 무덤도 아들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설명하여 준다.

간단하게 산소를 손질하고 나서 소주 한잔 부어 놓고 새롭게 합류하는 며느리와 함께 신고식 절을 올리는데, 우리 아들 및 며느리도 잘 되기를 간절하게 빌어본다.

 

< 간단하게 준비한 "음식과 소주" 한잔을 올리고 >

 

< 경건한 "마음" 으로 절을 하고 나서 >

 

이어 다시 능선을 내려와 인접하게 있는 다른 능선으로 올라가 너무나 일찍 돌아가신 또 다른 어머니 한분의 무덤으로 이동하는데, 나에게는 2명의 어머님이 계셨던 사연을 설명하면서 산소를 깨끗하게 정리한다.

 

< 홀로 계시는 "어머님" 무덤 >

 

< 간단하게 어머님 "무덤" 을 손질하면서 >

 

동일하게 한잔의 술로써 어머님에게 신고하고 나서 무덤 뒤편 산비탈 길에 돗 자리를 펼치고, 맛 있는 점심식사 시간 가져본다.

머나먼 길의 등산과 더불어 중 노동을 하다 보니, 전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야외에서 먹어보는 점심식사가 꿀 맛이라 가지고 온 2병의 소주도 이내 동이 나게 만든다.

 

< 어머님 무덤 가에서 맛 있게 식사하고 있는 "가족" >

 

현재 나의 나이도 60살이 넘은 중 늙은이가 되었지만, 산의 높이 및 땅가시 나무길을 핑게로 1년에 2번도 찾아 뵈옵지 못하는 죄책감을 뒤로 하고 천천히 마을로 내려와 마을 전경을 구경하여 보는데, 주마등 같이 지나간 옛 추억도 회상하면서 긴 설명으로 이어진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단촐한 20여 가구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삶의 터진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 이제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가고 노인 몇 가구만 살고 있는데, 그래서 마을이 엉성하게 변화가 되어 쓸쓸함이 묻어난다.

 

< 폐 "가옥" 으로 엉성하게 변한 마을 전경 >

 

< 저수지 둑에서 바라보는 나의 "다랭이 논" 전경 >

 

현재 마을 이장을 하고 있는 소꼽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는데, 최근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는 몇 명의 대학 교수가 전원생활을 하기 위하여 마을로 합류하여 새로운 집을 건축하여 주말마다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 작년에 나의 4촌 동생 한명도 귀촌을 하기 위하여 집을 완성하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오고 있는데, 마을에 새로운 활기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마을을 빙돌아 나의 4촌 집으로 들어가 보는데, 오늘도 4촌은 대구 까지 출퇴근하면서 건축 일로 집을 비우고 홀로 집을 지키는 제수씨와 함께 음료수 한잔을 하면서 신축하고 있는 건물을 구경하여 보니 금년 정월 초 입주식 때 보왔던 건물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 작년에 귀촌한 나의 4촌 "동생" 집 >    

 

특히 가정집 뒤편으로 소를 먹이기 위하여 거대한 축사를 건립하고 있는데, 짬짬히 손수 건축하다 보니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겨져 있어 조기에 완공되기를 기원하면서 집 뒤편에 있는 종중 밭으로 올라가 본다.

휴경하고 있는 종중 밭에 올해는 동생부부가 농사를 짖고 있는지 말끔하게 정리된 밭에 농작물이 새록새록 성장하고 있는데, 이 밭에 우리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문중 산소 대부분을 이장 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밭이라고 설명하여 준다.

 

< 흩어진 '문중 묘지" 를 이전 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약 600평의 밭 >

 

< 종중 밭 밑에서 한가롭게 풀을 먹고 있는 "염소" >

 

또 다시 마을로 내려오는 길가에 자리하고 있는 약 1.000여 평 되는 나의 논 위치와 논의 활용 방향을 설명하는데, 나도 논 일부를 집터로 조성하여 조립식 집이나 한채 갖다 놓고 주말 마다 채소나 가꾸면서 소일하여 볼까 생각하게 만든다. 

 

< 마을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나의 "논" 전경 >

 

비록 옛날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첩첩 산중의 고향이지만, 지금은 고속도로 남성주 Toll gate에서 약 10분 정도만 들어가면 만나는 거리에 있으며 대구에서 남성주 Toll gate 까지 4차선 도로가 완공 단계에 있다.

서서히 대도시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는 장소로 변모하다 보니,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도 다시 부각되는 귀향(歸鄕)의 마을이 되고 있다.

이렇게 짧은 시간이지만, 나의 고향에 대한 옛 추억을 간결하게 설명하면서 노후 나의 생활 방향도 다시 한번 더 재조명하여 보는 계기를 만들어 본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