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 문화와 산행.

잃어버린 땅 "조문국" 발자취가 남아있는 경북 의성군 "금성산과 비봉산" 종주산행을 하면서.

용암2000 2012. 9. 3. 18:38

2012년 9월 1일.(토요일)

 

오늘 부터 가을 문턱으로 달려가는 9월의 첫날이지만, 아직도 한여름의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어 이열치열(以熱治熱)라는 속담과 같이 더위에 대항하기 위하여 산행길로 나서 보는데, 오늘 산행은 경북 내륙지역에 있는 의성군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는 "금성산과 비봉산" 종주산행에 참석하여 본다.

 

< "금성산과 비봉산" 의 역사적 배경 설명서 >

 

대구에서 의성까지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아 드림산악회에서는 아침 성서 홈플러스에서 8시 30분 버스를 출발시켜 금성산 입구에 10시 정각에 도착하는데, 금성산과 비봉산 종주산헹 길은 하나의 아름다운 단풍나무 잎과 같이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골짜기 중간지점에 "수정사" 라는 천년고찰을 두고 빙돌아서 능선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이 금성산과 비봉산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생한 화산이지만, 현재는 완전히 화산 활동이 멈춘 사화산(死火山)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세 주변에는 매우 아름다운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의 높이가 그렇게 높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조용한 산이다.   

특히 이곳 금성산 주변에는 옛 신라가 발생하기 전 삼한시대의 부족국가 "조문국(召文國)" 이라는 나라가 형성되어 369년 간 통치한 나라로써, 경북 북부 지역이 되는 상주, 문경, 단양, 울진 등 광할한 지역을 지배하다가 신라 벌휴왕 2년(서기185년) 신라에 귀속되면서 역사 속으로 살아진 부족국가 이다.

이 금성산 주변이 조문국의 중심 주거지로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적지 중 제1호 "경덕왕" 무덤을 포함하여 약 200 여 기의 고분과 더불어 성터 및 석탑 등 옛 조문국의 유적들이 많이 산재하고 있어, 문화청에서는 1960년도 대대적인 발굴을 통하여 약 720여 점의 유물을 발견하여 국립 중앙박물관과 대구박물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유적을 간직한 조문국이 역사적으로 전연 알려지지 않고 교과서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삼한을 통일한 신라국에 자연적으로 귀속되다 보니 모든 자료가 신라사에 묻허 버리고, 단지 김부식씨가 쓴 "삼국사기" 에 한줄 기술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 유일한 실정이다.

의성군 금성면사무소에서 청송 방향으로 조금만 운전하여 수정리 마을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가면 잘 만들어진 주차장에 이르는데, 주차장에는 산행을 즐기기 위한 몇 대의 승용차만 주차하고 있으며 주차장 가장자리에는 금성산과 비봉산 산행을 안내하는 입간판이 높게 서 있다.

 

< "금성산과 비봉산" 을 알리는 산행 안내도 >

 

오늘 산행 Guide는 입간판에 그려진 산행도 그림을 보면서 산행 Schedule을 설명하는데, 산행 초입은 왼편 급경사의 오르막 길로 한시간 정도 올라가면 금성산 정상에 이르며 이 정상에서 부터 오른편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넘고 넘어 가면 반대편 비봉산 정상에 도착한다.

이 비봉산에서도 계속적으로 능선 따라 앞으로 가면 마지막 산불감시초소에 이르면서 하산길로 내려서는 원점회귀 산행이 이루어지는데, 만약 산행 콘디션이 좋지 않은 사람은 언제든지 오른편 갈림길에서 바로 하산을 시도하면 되고 전체 종주하는 사람은 약 6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삼삼오오 대열을 형성하면서 산행 초입에 들어서니 급경사의 오르막으로 형성된 길 따라 올라가는데, 이내 땀으로 목욕하기 시작하면서 고생길이 시작된다.

산행 초입에서 부터 수 많은 후회를 가지면서 이제는 죽어도 여름 산행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가슴 깊숙하게 새기면서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뒤 따라 오던 한 젊은 여인이 전번 주 월악산 중주 때 같이 산행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아저씨 힘을 내라고 하고 화살 같이 앞으로 지나간다.

 

< 산행초입 부터 인사만 하고 화살같이 통과하는 "여인" >

 

오늘도 제일 뒤편에서 천천히 고도를 상승하고 있으니 다 허물어진 "금성산성" 에 도착하는데, 이 금성산성은 조문산성 또는 금학산성이라고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 산성의 길이가 약 2.7Km에 높이 4m, 폭 2-4m의 성으로 산정석(山頂石)과 포곡식(包谷式)으로 축성되었으며, 축성 초기 년대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신라 문무왕 13년(637년)에 성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 허물어진 "금성산성" 을 넘어서 >

 

고을 촌로(村老)의 이야기에 의하면 조문성(召文城)이라고 전하여 내려오고 있으며, 특히 "의성현지(義城縣誌)" 에 의하면 고성(古城) 안에는 대궐 유지와 4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 "금성산성" 옆으로 난 오솔길 따라 >

 

이 산성 옆으로 나 있는 산행길 따라 고도를 상승하면서 산의 한 모퉁이에 이르면 아름다운 전망대가 나타나는데, 이 전망대에 서서 주변 조망을 구경하면 발 아래에는 조금 전에 출발한 주차장과 더불어 연못 아래로 아름다운 공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뒤편에는 산행의 마지막 종점이 되는 산불감시초소가 희미하게 윤곽을 나타내고 있다.

 

< 산의 허리 쯤에서 만나는 "전망대" >

 

<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연못과 주차장" 전경 >

        

여기서 부터 잘 만들어진 철제 사다리길 따라 한참 올라가면 옛날 병마를 훈련한 "병마 훈련장" 이 나타나지만, 주변 장소가 너무나 협소하여 군사를 훈련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장소인 것 같다.

 

< 잘 만들어진 "스테인레스 스틸" 계단 >

 

< "군사와 말" 을 훈련한 병마 훈련장 >

 

계속적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산행길 따라 400m 정도 더 올라가면 싸리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약 600평의 넓은 평지에 도착하면서, 오른편으로 조금 돌아서면 해발 530m "금성산(金城山)" 정상석을 만난다.    

 

< 해발 530m "금성산" 정상석을 배경으로 >

 

정상석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 한장만 남기고 앞으로 한 10여 분 정도 걸어가면, 왼편 언덕 아래 방향에 "흔들바위" 가 있다는 이정표가 나타나면서 그 곳까지 왕복 160m 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내려가는 경사도가 장난이 아니면써 너무 힘들 것 같아 구경을 포기하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니까, 또 다시 능선으로 크게 한번 내려갔다가 해발 550m "영니산" 정상에 이른다.

 

< 둘무덤이 쌓여있는 "소나무" 길 사이도 걸으면서 >

 

< "흔들바위" 가 있다는 이정표 >

 

영니산 정상에서 능선 따라 조금만 내려가다가 산의 허리 지점에 영니산 "봉수대" 에 이르는데. 여기 영니산 봉수대는 조선시대에 봉수대로써 운영 시기와 축조 년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문헌자료에 의하면 조선 중기까지 존재하였다고 한다.

 

< 영니산 "봉수대" 가 있었다는 장소와 안내문 >

  

이 봉수대에서 조금만 더 내려서면 이내 또 다른 능선으로 올라가는 빨래판과 같이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걸어가야 하는데, 높은 습도로 인하여 걷는 길이 너무나 힘이 든다.

최후의 힘까지 쓰면서 한참 올라가다가 반대로 내리막 길로 들어서는데, 내리막 길은 크게 위함하지도 않는 곳이면서도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든 철제 사다리가 너무나 잘 만들어져 있어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국가 예산과 자원 낭비가 너무나 심하게 투자한 산행코스이다.

 

< 위험하지도 않는 곳에 설치된 "스테인레스 스틸" 계단 >

 

무아지경으로 한참 걸어가면 노적봉 삼거리를 지나면서 비봉산 3거리에 이르는데. 이곳 3거리에서 수정사 사찰로 바로 내려가는 금성산 종주산행의 1/2만 산행하는 하프 지점에 이른다.

 

< 산행의 거의 반지점에 이루고 있는 "비봉산 3거리" 이정표 >

 

더위로 인하여 몇몇 산행인은 이곳에서 바로  하산하겠다는 후미 사람을 뒤로 두고 30분 정도 급경사의 오르막 길로 울라서면 오후 1시 정각 해발 671m "비봉산" 정상에 이른다.    

비봉산 정상은 이곳 종주코스 중 가장 높은 산으로써, 정상 주변에 헬기장과 함께 아담한 정상석이 놓여 있어 정상석을 배경으로 인증 사진 한장을 남겨본다.

 

< 해발 671m "비봉산" 정상석을 배경으로 >

 

아울려 숲속으로 들어가 일행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가지는데, 오늘 산행을 안내하는 Guide의 개인적인 취미가 산으로 돌아 다니면서 직접 채집한 더덕, 산삼, 도라지 등 산에서 나는 보약으로 술을 담그는 것으로 직접 만든 술을 한병 가지고 와서 술잔을 순회하면서 권하므로 몸 보신을 겸한 만찬이 된다.

충분한 휴식을 끝내고 하산길로 내려가는데, 여기서 부터 하산이 아니고 완전히 오르 내림이 반복되는 산이라서 땀으로 번벅이 되는 상태로 앞으로 전진하고 전진을 계속한다.

마침내 거대한 바위 뒤편에 도착하면서 이 바위가 "여인의 턱" 바위라고 하는데, Guide는 산행 초입에서 운무로 인하여 관찰이 불가능 하였지만 금성산성 부근에서 바라보면 현 지점이 여인의 이마와 얼굴을 지나 여인의 턱 부분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 "여인의 턱" 에 해당하는 거대한 바위 >

 

< "여인의 턱" 바위를 알리는 이정표 >

 

이 거대한 여인의 턱 바위를 돌아 갈려면 2개의 길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Rope를 의존하면서 암벽으로 이루어진 위험한 구간을 통과하는 길과 다른 하나는 바위를 우회하면서 내려가는 안전한 길로 나누어진다.

암벽구간으로 내려가면 여인의 턱 바위 뒤편에 남근석 바위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고 하나 Guide 혼자만 암벽구간으로 내려가고 나머지 일행은 안전한 길로 내려서서 밑에서 여인의 턱을 올려다 보는데, 바위 중앙에 외롭게 자라고 있는 천년송 나무 곁에 남근석 바위가 있어 사진을 최대한 Close-up하여 찍어보니 거리가 멀어서 확실치가 않다.

 

< 여인의 턱 바위 뒤편 밑에서 바라보면 오른편 절벽 중간 "남근석 바위와 천년송" 소나무 모습 >

 

또 다시 급경사 내리막 길로 내려가면 수정사 3거리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수정사 방향으로 내려서면 시간의 단축과 더불어 매우 안전한 산행이 되지만 일행은 어차피 고생을 자초하면서 산행을 시작한 사람들이라 능선으로 올라가는 종주코스로 가자고 하여 급경사의 오르막 길로 들어선다.

약 30분 정도 씨름하면 비봉산이 만든 쌍봉 중에 하나가 되는 606m 봉에 이르면서 주변 조망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걸어온 금성산 능선이 품고 있는 계곡 깊숙하게 "수정사" 사찰 일부분이 고즈늑하게 자리하고 있고, 방금 내려오는 여인의 턱 바위 방향에는 거대한 암릉이 비봉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첨가하면서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일품이다.

 

< 지금까지 걸어온 "금성산" 능선과 계곡 전경 >

 

< 606m 봉에서 바라본 "수정사" 모습 >

 

< 606m 봉에서 바라보는 "여인의 턱" 바위 전경 >

 

왼편 낭터리지 방향으로 내려다 보면 도로 따라 마을이 점점이 수 놓고 있는데, 2009년 3월 의성 산수유 축제장을 찾아 제2회 전국노래자랑에 참관하였던 산수유 마을이 어느 지점에 있는 것 같지만 조망이 좋지 않아 찾지 못함이 아쉽다.

 

< 가는길 왼편 낭떠리지 아래에 있는 "마을" 전경 >

 

또 다른 몇 개의 능선을 넘고 넘어서면 최종적으로 산불감시초소에 이르면서 휴식과 더불어 이곳에서 보는 조망도 일품이라서 사진 몇 장을 찍어보는데, 특히 용암이 분출하면서 만든 암릉 형상이 한폭의 수채화를 만들고 있어 정말 지금까지 숨은 비경을 간직한 명산도 몰라보고 지내왔다는 것 후회가 되는 산이다.

 

< 마지막 봉우리를 장식하고 있는 "산불감시초소" 전경 >

 

< 용암이 불출하여 만든 금성산 "암릉 계곡" >

 

< 산불감시초소에서 지나온 "606m 봉" 을 되돌아 보면서 >

 

이 산불감시초소에서 급경사 내리막 길로 30여 분 정도 더 내려서면 연못 아래 수정사로 올라가는 도로에 도착하면서 산행은 거의 종료되는데, 아스팔트 길 따라 3분 정도 내려가면 주차장에 도착한다.

 

< 마지막 아스팔트 도로 옆에서 길을 안내하는 "산행 종점" 이정표 > 

 

그래도 하산 종료시간 보다 약 10여 분 빠르게 제일 선두보다는 약 2시간이 늦게 3시 50분에 도착하는데, 오늘 중주코스를 선택한 사람 중에서 영광스럽게 제일 끝으로 도착하여 먼저 도착한 사람들에게 많은 위로를 받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