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및 트레킹.(설악산)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삶이 살아 있는 "백담사와 오세암" 을 찾아서.

용암2000 2013. 5. 30. 21:09

2013년 5월 26일.(일요일)

 

지금까지 내설악 방향으로 한번도 방문하지 못하고 미지의 장소로 남겨 두면서도 언제나 동경의 장소로 여기고 있는 곳에 대구 드림산악회에서 백담사에서 오세암까지 왕복으로 걷는 "침묵의 길" 트레킹 코스가 개발하므로 Wife와 함께 아침 일찍 버스에 오르니 많은 일행들이 동승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내설악 방향으로 거의 방문하지 못한 이유는 이곳 대구에서 당일로 내설악산까지 왕복하는 시간이 자그만치 10시간 이상 요구되므로,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피곤의 발생으로 너무나 힘든 길이라써 차일피일하다 보니 방문의 기회를 갖지 못한 장소이다.

어찌하던 아침 5시 30분 집에서 출발하여 고속도로 중간지점에서 아침식사와 더불어 휴식을 가지고 나서, 백담사 입구가 있는 용대리 마을에 10시 50분에 도착하면서 Guide는 전반적인 트레킹 Schedule를 설명하여 준다.

오늘 트레킹 일정은 용대리에서 마이크로 버스를 이용하여 7.1Km 떨어진 백담사까지 이동하여 백담사를 간단하게 구경하고 나서, 백담사에 3,5Km 거리에 있는 영시암과 영시암에서 2.5Km 떨어진 오세암까지 총 6Km 정도의 트레킹 길을 걷는 것으로 백담사에서 오세암까지 평균적으로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아울러 내설악산의 진면모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오세암 입구에 있는 깔딱고개 오른편 망경대로 잠시 올라가면 추가 1시간 정도 더 필요하며, 또한 마이크로 버스의 운행 시간이 약 30분 정도가 소요되므로 산술적으로 오세암까지 왕복하는데 총 7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버스로 왕복하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탑승하므로 다소의 기다림이 필요하여 이 시간도 잘 감안하여야 하는데, 본인의 체력에 적당하게 걷다가 중간지점에서 Feed Back하여 오후 6시 정각까지 주차장으로 돌아와 대구로 출발하면 밤 11시 경 각자의 집에 도착이 가능하여 진다고 하면서 다른 일행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협조 부탁한다고 한다.

그래서 트레킹에 주어진 총 시간이 7시간 정도가 되므로 아무리 생각하여도 나에게는 만경대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여 지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단지 오세암까지 왕복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출발에 임한다.

인당 2.000원 하는 버스표를 구입하여 긴 줄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9대의 마이크로 버스가 연속적으로 운행하므로 많은 기다림 없이 바로 승차가 이루어진다.

버스는 백담사 계곡 따라 올라가 일주문을 통과하여 주차장에 하차 하니 아침 시간에도 이미 설악산 상부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줄이 더 길게 만들어져 있어,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도 많구나 하는 의구심이 발생한다.

 

< 용대리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마이크로 버스" >

 

주차장 바로 위쪽에 백담사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이 붙어있어 잠시 그 내용을 읽어보는데, 백담사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 2리 내설악산에 자리잡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며, 신라 진덕여왕 1년(647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 주차장 뒤편 "백담사" 를 설명하는 안내문 >

 

백담사를 처음 창건 할 때, 한계령 부근에 건립하여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한 다음 사찰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고 하였으나 창건한지 50여 년 만에 불타버리고 30년 가까이 빈터로 남아 있다가 성덕여왕 18년(719년)에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 중창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원성왕 1년(785년)에 "종연(宗演) 및 광학(光學)" 스님이 한계사 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절터를 옮겨 5년 만에 다시 중건하여 사찰의 이름은 운흥사(雲興寺)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여러번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어 사찰의 이름을 심원사(深原寺), 선구사(旋龜寺), 영취사(靈鷲寺) 등으로 불려지다가 유독 백담사만 화재가 많이 발생하여 소실하므로 설악산 최고봉인 천황봉에서 100번째 담(潭)이 있는 곳에 사찰을 세우며는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적 속설로 절을 건립하므로 화재가 발생하지 않고, 사찰 이름도 "백담사(百潭寺)" 라 고쳐 불렸다고 한다.

어찌하던 새벽을 깨우면서 찾아온 침묵의 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백담사로 들어가는 해탈교(수신교)를 건너 사찰 영역으로 들어가면, 입구에는 금강문(金剛門)이 기다리면서 금강문 내에 모시고 있는 사천왕이 내려보면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자세를 낮추게 하라고 무언의 압력을 준다.

 

< 해탈교(수신교)를 건너 "백담사 금강문" 으로 들어가는 입구 >

 

< 금강문을 지키는 "사천왕상" >

 

다른 사찰보다 백담사로 들어가기에 다소 조심스러움이 발생하므로 사천왕상에게 90도 목례를 드리고 나서 금강문을 통과하면 바로 앞에 또 다른 솟을대문 형태의 불이문(不二門)이 자리잡고 있는데, 현판에는 불이문이 아니고 "백담사(百潭寺)" 라고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 금강문 뒤편에 있는 솟을대문 형태 "불이문" >

 

이 불이문을 통과하면 범종각 건물을 만나고 그 범종각 뒤편으로 조금 들어가면 왼편으로 화엄실 건물과 오른편으로 법화실 건물의 자리잡고 있는데, 왼편의 화엄실 건물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방이 전직 전두환 대통령이 머물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으며 방의 내부에는 대통령 부부가 약 2년 2개월 간 은둔 생활하면서 사용한 간단한 옷과 생활 필수품들이 가지련하게 놓여있다.

 

< 불이문 오른편 뒤편에 있는 "범종각" 건물 >

 

< 국락보전 앞에 있는 "화엄실과 법화실" 건물 >

 

< 왼편 화엄실 건물 중앙에  전직 "전두환 대통령" 이 기거한 방 >

 

이 화엄실과 법화실 건물을 통과하면 아담한 3층석탑을 품고 있는 백담사의 본찰 "극락보전(極樂寶殿)"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극락보전에는 보물 제1182호 "목조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있는 사찰이다.

 

< 백담사의 본찰 "극락보전" >

 

이 극락보전 뒤쪽 왼편으로 산령각(山靈閣)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오른편으로는 감로수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갈증을 해소시키면서 물을 마시고 있고, 또한 뒤편 연못에는 연꽃과 더불어 올챙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어린들이 자연 생태계 학습장으로 많이 관찰하고 있다.

 

< 극락보전 뒤편에 있는 "감로수" >

 

이 밖에 극락보전 오른편으로는 나한전(羅漢殿), 만해당(卍海堂), 만해기념관, 산방, 선원 등 많은 건물이 자리잡고 있고, 만해기념관 앞에는 만해 선생님의 동상과 더불어 "나룻배와 행인" 이라는 시비(詩碑) 한기가 서 있다.

 

< 극락보전 오른편에 있는 "만해당" >

 

<,만해당 앞에 있는 "만해기념관" 건물 >

 

< 만해기념관 마당에 있는 만해 선생님 "동상" >

 

< 만해 동상 옆을 지키는 "시(詩)" 비 >

 

간단하게 주변을 돌아보고 만해기념관으로 들어가면 문의 입구 "인도에는 간디가 있다면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는 글씨로 만행 선생님의 위대 함을 보여주고 있는 문구가 보인다.

 

< 만해기념관 문에 쓴 "글씨" >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님은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탄생하였으며 본관은 청주 '한(韓)' 씨이며 호는 만해(卍海)로써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시대의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저항 시인이었고, 불교 언론, 교육 활동, 작가, 승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분이다.

특히 만해 선생님 1896년(17세 때)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서 머슴 생활을 시작하지만 번뇌로 인하여 집과 사찰로 가출 및 출가를 거듭하다가 1905년(26세 때) 설악산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계(戒)을 받아 스님이 되었으며,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크게 주장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고 독립 선언서에 "공약 3장" 을 추가 보완하였으며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가 플려났는데,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의 書)" 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으며 1926년 그의 대표적 시 "님의 침묵(任의 沈默)" 을 발표하여 우리 문단에 대표적인 시인이 된다.

이렇게 많은 업적과 발자취가 남아 있는 기념관 문으로 들어서면 정면 벽면에 또 다른 만행 상(像)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옆으로 안내 Desk 주변에 만해 선생님이 저술한 책을 판매하는 사람이 앉아 있다.

 

< 만해기념관 안에 있는 "만해 상" >

 

"ㄱ" 자로 된 기념관 내부로 더 들어가면 만해 선생님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옥고를 치룬 내용과 더불어 많은 활동내역 등을 전시하고 있어, 사진도 찍으면서 한참 관람하고 있으니 한쪽 벽면에 사진 촬영 금지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어 많은 결례를 범하고 만다.

 

< 만해기념관 내에 있는 "전시물" >

 

다소 미안함을 느끼면서 다음 목적지를 위하여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한바퀴 돌아보고 기념관을 나와 경내의 왼편 방향으로 넘어가니까 이쪽에도 농암실(壟菴室), 만해적선당, 만해교육관 등 많은 건물이 자리잡고 있지만, 세세하게 돌아보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사찰을 떠난다.

 

< 백담사 오른편 있는 "농암실" >

 

< 농암실 뒤편에 있는 "만해교육관" >

 

오세암으로 올라가는 산행 들머리로 가기 위하여 위쪽 임시 가교를 건너는데, 이 가교에서 보는 수렴동계곡의 넓은 개울에는 흐르는 물 보다 많은 돌탑이 쌓여 있는 모습도 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 해탈교(수신교)에서 바라보는 "임시 가교" >

 

< 임시 가교에서 본 백담사로 들어가는 "해탈교(수신교)" >

 

< 임시 가교에서 바라보는 "수렴동 계곡과 돌탑" >

 

가교를 건너자 마자 트레킹 길은 개울 옆으로 만들어진 숲속으로 걷기 시작하는데, 오솔길 주변에는 이름없는 야생화와 더불어 시들면서 떨어지고 있는 철쭉꽃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이 애초롭게 하는 길이지만 그래도 트레킹 길은 하늘을 가리고 있는 울창한 숲으로 삼림욕 하기에 최상의 조건이 되는 길이다.

 

< "오세암과 봉정암" 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

 

< 떨어지고 있는 "철쭉꽃" 을 보면서 >

 

가끔씩 보이는 수렴동 계곡의 바위와 담(潭)의 물을 보면서 조금 걸어가면 백담사 탐방센터 건물이 나타나면서, 건물 내부에는 설악산에 자생하는 동물 및 식물의 생태계를 표본으로 만들어 놓아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숲속에 있는 "백담사 탐방센터" 건물 >

 

이 탐방센터 건물을 통과하여 설악산 깊숙하게 들어가면 대부분의 길은 개울 옆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나무테크 길로 만들어져 있어, 소중한 국립공원의 해손을 최소화 할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 수렴동 계곡에 있는 "담(潭)" >

 

< 잘 만들어진 "나무테크 길" 을 걸으면서 >

 

트레킹 길은 거의 평지와 같은 길이 되어므로 크게 힘 드리지 않고 무아지경으로 약 1시간 30분 정도 올라가면 "영시암(永矢庵)" 에 이르는데, 암자의 건물들이 무분별하게 지어져 있어 다소 산만 함이 느껴지는 암자이다.

 

< 트레킹을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 "나무" >

 

그런데 암자 주변에는 암자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채소를 키우는 텃밭을 많이 조성하면서 많은 농기구을 활용하고 있는데, 특히 밭의 가장자리에 경운기 한대가 자리하고 있어 여기까지 어떻게 경운기를 운반하여 왔는지 또 의문이 발생하는 암자이다.

 

< 많은 텃밭을 가꾸고 있는 "영시암" >

 

암자에서 지어준 간이식 식당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준비한 김밥을 먹고 암자 주변을 돌아보는데, 영시암 본당에 현판이 붙어있는 영시암이란 한자 글씨가 너무나 이색적이면서 붙어있는 글씨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한자와 뜻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 난이한 글씨의 현판이 붙어있는 "영시암" >  

 

길 영(永)자, 화살 시(矢)자를 쓰는 영시암은 백담사에 딸린 암자로써, 조선 인조 16년(1648년) "김창흡" 이라는 분이 창건하였으며, 1691년도 "설정(雪淨)" 스님이 중건한 암자라고 한다.

암자가 만들어진 설화(說話)에 의하면 조선 숙종 15년(1689년)에 숙종의 정비 인현왕후 민씨가 왕자를 출산하지 못하고 숙빈 장씨가 숙종의 아들을 먼저 생산하는데, 역사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장희빈" 이 아들을 얻으므로 숙종이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자 영의정 "김수함" 이 시기상조를 이유로 세자 책봉의 불가함을 아뢰었다가 관직을 박탈당하고 사약을 받는다.

그래서 그의 아들 김창흡이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설악산 영시암으로 찾아와 산수를 즐기면서 영원히 세상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사찰을 짖고 "영시(永矢)"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감로수가 나오는 나무 아래에 많은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한잔의 물을 마시고 오세암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길을 재촉하여 산 모퉁이를 돌아서서 올라가니 오세암과 봉정암으로 갈려지는 3거리에 도착하면서 안내 지도가 붙어있는데, 여기서 오세암까지는 2.5Km로써 1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기술되어 있다.

 

< 영시암 "우물" 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 >

 

< 영시암 바로 뒤편 "오세암과 봉정암" 으로 갈려지는 3거리 이정표 >

 

< 영시암에서 오세암까지 거리를 알리고 있는 "안내도" >

 

그런데 일행 중 한 부부가 오세암 가는 길의 중간 지점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면서 여기서 부터 다소 힘이 많이 요구하는 길이라고 하면서 산행을 포기하고 백담사로 내려가 사찰 구경이나 하겠다고 하면서 하산하므로, 함께 걷는 Wife도 포기를 원하므로 천천히 먼저 하산 하라고 하고 나서 혼자 오세암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오세암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야생화 꽃도 많이 인사를 하지만, 특히 설악산 다람쥐가 사람의 발소리도 두려워 하지 않고 같이 걷자고 하면서 길을 안내하여 주므로 지루함도 없이 걷기에 안성맞춤의 길이 된다.

 

< 오세암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야생화" >

 

< "다람쥐" 와 함께 걸으면서 >

 

약 1시간 정도 올라가면 가는 길 옆으로 수백년 된 소나무가 많이 있어 감탄사가 절로 연발하면서 계속적으로 고도를 상승하면 마지막으로 오세암까지 600m가 남았다는 이정표를 만나는데, 여기서 코가 땅에 닿을 정도의 급경사 오르막 길을 올라가야 한다.

 

< 가는 길에서 만나는 거대한 "노송" >

 

한 400m 정도 혼신의 힘으로 올라가면 숨이 하늘까지 차 오른다는 깔딱고개에 이르면서 오세암에서 염불소리가 온 산을 울리면서 메아리가 되어 들려오면서 우측으로 입산을 통제한다는 경고문이 붙어있는데, 이 경고문을 무시하고 올라가면 설악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망경대(望景臺)" 에 이른다고 Guide가 설명하여 준 것이 기억난다.

 

< 오세암으로 넘어가는 "깔딱고개" >

 

설악산에는 3곳의 만경대가 있는데, 만경대는 설악산의 산 중 미(美)를 감상하기 좋은 장소를 가르키는 봉우리로써, 오세암 만경대에 도착하면 설악산의 최고 암릉 구간을 형성하고 있는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의 풍경이 그림과 같이 펼쳐지는 곳으로 구경하기에 최상의 꼭지점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주어진 시간을 점검하니 1시간 정도 더 투자한다는 것이 다소 무리가 따르므로 만경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오세암으로 바로 내려가는데, 지금까지 힘들어 올라온 것이 너무 아쉬운 내리막 길이다.

 

< "만경대" 로 올라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경고문 >

 

약 10분 정도 내려가면 오세암 마당에 도착하는데, 오세암은 거대한 암름과 노송으로 치장하고 있는 깊은 내설악산 계곡 깊숙이 꼭꼭 숨겨져 있어 속세와는 완전히 단절된 암자이다.    

이곳 오세암(五歲庵)도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이면서 백담사의 부속 암자로써 신라 선덕왕 13년(647년)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조그마한 선실을 짖고 머물었던 자장율사가 관세음보살의 전신을 친견하고 나서 관세음보살의 도량임을 나타내기 위해 "관음암(觀音菴)"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명종 3년(1548년) "보우선사(普雨禪師)" 가 중창하고 나서 인조 21년(1643년) "설정(雪淨)" 대사가 다시 중건하였는데, 오세암은 지형적으로 연꽃 송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로 주위 산 봉우리들이 아름다운 연꽃 잎을 이루고 있어 설악산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온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오세암을 널리 일려진 것은 불교사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이 이곳에서 많이 정진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생육신의 한분이 되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으로 그는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는 것을 반대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입산 수도의 길로 들어와 세조 1년(1445년) 이곳에서 머리를 깍고 출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또한 백담사와 오세암은 금강산에서 수도하여 도력을 성취한 스님들이 중생 교화를 위하여 한양으로 갈 때 반드시 머무르게 되는 곳으로, 보우선사 이후 이 암자는 스님들이 한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대기소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장소이다.

암자 이름을 관음전에서 오세암으로 바꾼 것은 인조 21년(1643년)에 설정스님이 중건한 다음에 5살의 동자에 대한 얽힌 유명한 관음영험 설화가 내려오는 것으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설정스님이 겨울 양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동해 바다에 있는 양양으로 내려갈려고 할 때, 함께 거주하고 있는 집안 조키인 어린동자를 암자에 혼자 두고 갔다가 올려고 2일분의 음식을 만들어 놓고 만약에 무서움이 발생하면 부처님 앞에서 "관세음보살" 이라고 염불을 올리라고 하며 하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돌아올려고 할 때 갑자기 많은 눈이 내리므로 길이 막혀 눈이 녹을 때까지 3달 동안 신흥사에 머물었다가 절에 올라오니, 목탁소리와 함께 관세음보살이라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어린동자가 그때 까지 아무런 탈도 없이 부처님 앞에서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관세음보살님이 내려와 어린동자를 돌보아 주었다고 하는데, 그때 그 어린동자의 나이가 다섯살이라서 오세암이라고 고쳐 불렸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설화를 가지고 있는 암자를 돌아보는데, 오세암 본당에는 "천진관음보전(天眞觀寶殿)"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건물 내에는 매우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있는데, 한 스님과 함께 불자들이 예불을 드리고 있다.

 

< 오세암의 본당 "천진관음보전" 건물 >

 

< 본당 내에 있는 "관세음보살" >

 

이 천진관음보전 앞으로 범종각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여기에 있는 범종각 내부에는 거대한 북과 동종이 걸려 있는데, 동종 색갈이 황금색으로 도금되어 있어 이러한 모습도 처음으로 대면하는 색상이라 이색적인 동종이 된다.

 

< 오세암 본당 앞에 있는 "범종각" 건물 >

 

< 황금색으로 도금되어 있는 "동종" >

 

본당 옆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건물 "시무외전(施無畏殿)" 이라는 법당이 나타나는데, 시무외전은 "모든 중생의 마음에 있는 온갖 두려움과 걱정을 없애 준다는 뜻" 을 가진 법당으로 이 법당 내부에는 천수관음상과 더불어 삼천분의 불상들이 가지런하게 진열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화려 함을 장식하고 있다.

 

< 오세암 본당 오른편에 있는 "시무외전" >

 

< 시무외전에 모시고 있는 "천수관음상과 삼천불상" >

 

오세암 본당과 시무외전 건물 뒤편의 돌계단을 통하여 위로 조금 올라가면 "동자전(童子殿)"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동자전에서도 스님 한분이 불공을 올리고 있다.

 

< 시무외전 뒤편에 있는 "동자전" >

 

이 동자전 오른편 옆으로 마등령과 봉정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는 이정표 따라 조금 들어가면 오세의 어린동자가 혼자서 기도를 올렸다는 "오세암(五歲菴)"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오세암 주변에 암자를 찾아오는 불자들이 하룻밤 머물 수 있는 숙소와 식당이 함께하고 있다.

 

< 동자전 계단 앞에 있는 "마등령과 봉정암" 가는 이정표 >

 

< 5세의 어린동자가 불공을 올린 "오세암" >

 

식당 앞에 휴식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평상이 놓여있어 많은 사람들이 머물면서 주변 산세를 구경하고 있는데, 오세암 주변의 암릉 능선들이 하늘과 뽀족한 경계선을 만들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으며 가까이는 조금 전에 올라보지 못한 만경대가 손에 잡힐 듯 자리잡고 있는 모습도 한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

 

< 동자전 마당에서 바라보는 "내설악산" 전경 >

  

< 마등령으로 올라가는 방향의 "암릉" >

 

< 오세암에 바라보는 "망경봉" 꼭지점 >

 

또한 동자전 왼편 옆으로 만들어진 길 따라 야산으로 조금 들어가면 "삼성각(三聖閣)" 건물이 울창한 숲속에 홀로 자리잡고 있으나, 찾은 사람이 없는지 매우 한적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 다소 외진 곳에 있는 오세암 "삼성각" >

 

이 밖에 암자 주변에 불자들이 머물 수 있는 별도의 임시 숙소 건믈과 더불어 해우소 등 많은 건물이 보이고 있으며, 암자 주변에 추가 건물을 신축하기 위하여 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과 자재들이 많이 쌓여 있어 암자를 매우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   

 

< 추가 건물을 건축하기 위하여 다소 어수선한 "오세암" >

 

짧게 오세암에 머물면서 아름다운 내설악산 비경에 도취하고 있다가 하산길이 만만치 않아 에둘려 자리를 떨고 일어나 경내를 벗어나고 있는데, 그때 Guide가 몇 명의 일행과 함께 만경대를 구경하고 오세암으로 내려오면서 일행의 동정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있다.

간단하게 먼저 간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혼자 신속하게 하산길로 내려가는데, 무릎 통증이 발생하므로 최대한 안전을 우선으로 하여 거북이 걸음으로 내려와 백담사 인접지역에 도착하니 그때 비로써 핸드폰이 열리면서 먼저 내려간 Wife와의 통화가 이루어진다.

승차장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내려갔는지 다소 한산하므로 이내 버스에 승차하여 백담사 계곡을 내려가 용대리에 도착하는데, 예정시간 보다 한 시간이나 빠른 오후 5시경에 도착하므로 많은 여유가 발생한다.

그래서 용대리에 있는 한 상점으로 들어가 설악산의 특산품 황태 한 축과 약간의 산나물을 구입하고, 인접한 식당으로 들어가 별미의 황태구이와 함께 옥수수 막걸리 한병을 시켜놓고 하산주를 마셔본다. 

 

< 용대리 주차장 앞에 있는 "상가와 식당" >

 

< 설악산의 별미 "황태구이와 옥수수 막걸리" >

 

6시 정각 모든 일행이 안전하게 하산이 종료하므로 Guide는 인원 점검과 동시에 대구로 출발하는데, 중간에서 간단하게 저녁식사 시간을 가지면서 대구에 밤 11시 경에 도착한다.

문제는 이곳 대구에서 당일로 내설악산(內雪岳山)까지 갔다오는 것이 나의 년식(年式)과 체력(體力)으로는 무리한 행동이 되므로 몇 일 동안 완전히 KO의 몸이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