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박물관.

백제의 옛 도읍 공주시에 있는 "국립 공주박물관, 무령왕릉, 공산성" 을 바람같이 돌아보고.(2)

용암2000 2013. 12. 4. 23:04

2013년 11월 30일 (토요일)

 

2. 무령왕릉 관람.

 

국립공주박물관 뒤편에 있는 송산리 고분군 관람 방법은 먼저 주차장 인근 지하에 있는 건물로 내려가 웅진 백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관을 관람하고 나서, 야산 뒤편으로 돌아가 송산리 고분군과 더불어 무령왕릉도 함께 관람이 이루어지는 것이 순서가 된다.

 

< 주차장 앞에 있는 "무령왕릉" 지시판 >

 

< "송산리 고분군" 조감도 >

 

1) 웅진 백제 역사관. 

엘리베이트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서 오른편 복도 따라 들어가면 먼저 웅진 백제의 역사를 조명하여 주는 영화관을 만나는데, 방금 영화가 끝나므로 다음 상영시간 까지 약 30분 이상 기다림이 요구되므로 영화를 통하여 사진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생략하고 반대편 백제 역사관 Booth로 들어가 본다.

 

< "웅진 백제 역사관" 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트 >

 

웅진 백제 역사는 문주왕 원년(서기 475년) 서울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10년(서기 538년) 까지 5대왕 64년 간 공주 일원에서 왕도(王都)를 지키면서 백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전시실이다.

 

< "웅진 백제"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웅진 백제는 주변 여러나라와 왕성한 교류를 통하여 백제 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창출하였고, 특히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백제의 전성기 시대를 누리게 하였으며 또한 일본으로 세련된 문화를 전수한 나라이다.

 

< "부국 백제" 를 알리고 있는 한자어 >

 

역사관 내에는 무령왕에 대한 정사(政事)와 더불어 많은 치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백제의 위상을 가름 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공주의 10경 사진과 더불어 풍경을 잘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시 찾아보는 공주가 되도록 많이 홍보하고 있다.

 

< "공주 10경"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2)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 관람.

웅진 백제 역사관에서 엘리베이트를 타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야산을 돌아 올라가면 송산리 고분군으로 들어가는 매표소가 나타나는데, 매표소에서 인당 1.5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내부로 들어가면 고분군 입구 오른편 비탈면에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 출입구가 보인다.

 

< "송산리 고분군" 으로 들어가는 매표소 >

 

<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 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시대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송산(宋山)의 남쪽 기슭 경사면에 있는데, 현재 이곳에는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모두 7기의 고분이 남아 있다.

무릉왕릉을 기준으로 위쪽 북동 방향으로 제1호에서 제4호까지의 고분이 자리잡고 있으며, 무령왕릉 인접지역으로 제5호와 제6호의 고분이 거대한 구릉지와 같이 함께 두리뭉실하게 만들어져 있어 설명문이 없다면 무덤인지 구릉지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 뒤편에 있는 "송산리 고분군" 전경 >

 

무덤의 형식으로 제1호에서 제5호까지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이고 제6호 고분과 무령왕릉 무덤은 연꽃무늬 벽돌로 쌓은 터널식 벽돌무덤으로 중국의 묘제 및 고구려 고분 양식을 많이 모방하였으며, 특히 무령왕과 왕비의 관(棺)은 일본에서 자라는 금송(金松)으로 만들어진 것을 사용하므로 백제는 주변 국가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은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릉(陵)으로, 1971년 7월 여름 장마철에 제5호 및 제6호 고분 내부에 스며드는 물기를 막기 위하여 배수로 공사 과정에서 우연하게 발견되어진 무덤이다.

이곳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다른 왕릉과 차별나게 인위적인 파괴는 물론 붕괴 등의 피해가 전연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에서 발굴이 이루어지므로 총 108종 4.600여 점의 유물이 나왔고, 유물 또한 매우 우수하여 국보로 지정된 것 만으로 총 12종류나 된다.

특히 무덤 입구를 지키는 묘지석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왕의 무덤 중 유일하게 피장자와 년대를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 연구의 편년(編年) 자료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 또한 백제의 문화, 국제교류, 백제사 연구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고분군은 1997년 부터 고분 보존 차원에서 내부 관람이 중지하므로 관람객들은 웅진 백제 역사관과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을 통하여 백제 역사 이야기를 비롯하여 고분 내부를 관람할 수 있고, 발굴 과정과 더불어 무령왕릉 체험실 영상 등 다양한 코너가 마련되어 있어 더욱더 선명하게 역사를 조명할 수 있다. 

 

< "백제 고분" 의 축조과정을 설명하는 안내문 >

 

< "백제 고분" 을 만드는 모습의 재현 >

 

자동문을 열고 입구에 있는 안내 Desk 뒤편에 있는 영상실로 들어가 간결하게 고분군 역사를 먼저 관람하고, 반대편에 만들어진 돌방무덤 형태로 만들어진 제5호 모형 묘실(墓室)을 구경하기 위하여 매우 좁은 입구를 기면서 고분 내부를 들어가 묘실의 크기를 가름하여 본다.

 

< 모형으로 만든 제5호 고분 "돌방무덤" 설명서 >

 

다시 모형 묘실을 나와 옆으로 돌어가면 제5호 고분 단면도를 나타내는 고분 모형도가 만들어져 있어, 더욱더 상세하게 고분 내부를 관찰하면서 굴식 돌방무덤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제5호 고분 "돌방무덤" 내부 단면도 >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어진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Booth와 더불어 각종 모형도가 만들어져 있으며, 그 옆으로 무릉왕릉 모형 묘실(墓室)이 만들어져 있어 실제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 해설사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본다.

 

< "무령왕릉" 모형 묘실에서 해설을 듣고 있는 관람객 >

 

묘실 내부 구조를 관찰하여 보면 평면은 남북으로 장방형이며 터널형 천정을 하고 있으며, 전면 중앙에 무덤으로 들어가는 연도가 부설되어 있어 철(凸)자 형의 전축 단실묘(單室墓) 형태라고 한다. 

무령왕릉의 묘실 크기는 남북 길이 4.2m에 동서 너비 2.72m, 높이 2.93m 이며, 무덤 내부 현실 크기는 물의 흐름을 방지하기 위하여 남쪽 벽면에서 1.09m 범위를 제외하고 모두 바닥보다 21Cm 정도 한단 높게하여 왕과 왕비의 합장 관대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묘실을 쌓고 있는 벽돌 모양은 연꽃 무늬를 하고 있으면서 여기에 사용한 벽돌의 종류는 총 28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28가지를 사용한 것은 한달 28일의 음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무령왕릉 내부 구조가 하나의 소우주(小宇宙) 형상을 나타내고 있는 무덤이 된다고 해설하여 준다.  

특히 묘실 앞에 있는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 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쳐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라고 쓰여 있다.

이를 통하여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 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무령왕과 합장으로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무령왕릉" 축조 과정 설명서 >

 

시간적인 여유와 사전 지식을 가지면서 해설사의 내용을 경청하고 기록하여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오늘도 그냥 한쪽 귀로 듣고 다른쪽 귀로 흘려보내는 무기력한 무지의 발로로 인하여 내용을 기록할려고 하니 한 대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설사의 긴 여운을 남기고 모형전시관 뒤편으로 나와 돌계단 따라 능선으로 올라가면 고분군에 도착하는데, 제일 먼저 만나는 제6호 고분 입구와 그 옆으로 돌아서 가면 제5호 고분 입구를 만난다.

 

< 제일 먼저 만나는 송산리 고분군 "제6호 고분 묘실" 입구 >

 

< 그 다음에 있는 송산리 고분군 "제5호 고분 묘실 입구" >               

 

그러고 제5호 고분을 돌아서 올라가면 무령왕릉의 고분 입구를 만나지만, 각 고분 입구마다 굳게 잠겨져 있어 실제 묘실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여 지며 계속하여 비탈면 따라 올라가며 제1호 고분에서 제4호 고분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시간의 촉박으로 인하여 중간지점까지 내려와 들어오는 정문 방향과 다른 뒤편 후문 방향으로 걸어가서. 주차장에 도착하게 만든다.

 

< 제5호 고분을 돌아서 만나는 "무령왕릉 묘실 입구" >

 

3. 공산성을 걸으면서.

송산리 고분군 주차장에서 승용차에 올라 점심식사 때 방문하였던 고마나루돌쌈밥 식당 앞에 있는 공산성 서문 금서루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공산성을 관람하기 위하여 조감도를 보면서 대략의 걷고자 하는 길을 선정하여 본다.

 

<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금서루" 문 >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왕성(王城)으로 금강(錦江)에 접한 공산(公山)의 능선과 계곡을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써, 이 산성은 백제 제22대 문주왕이 475년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뒤 성왕 때가 되는 538년에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백제왕이 거주했을 것으로 알려진 성이다.

성(城)의 이름은 백제시대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 등으로 불려진 산성이며 백제시대 토성(土城)으로 축조한 후 여러 차례 개축을 거쳐 현재는 동쪽 일부분만 토성이고, 나머지 대부분이 석성(石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의 둘레는 2.660m의 장방형 형태를 하고 있으며 동(영동루), 서(금서루), 남(진남루), 북(공북루)의 네 곳에 성문을 가지고 있는데, 성 내에는 추정 왕궁지, 임류각, 만하루, 공산정, 연지 등과 같은 백제 유적을 비롯하여 쌍수정, 영은사, 광복루 등 조선시대 유적들도 함께 남아 있는 산성이다.

특히 2011년에는 년도(年度)가 새겨진 백제 갑옷과 마갑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공산성을 돌아보는 데는 약 1시간 가량이 소요되므로 금강의 경치와 함께 옛 정취를 느끼면서 천천히 산책하는 것이 최상의 장소가 되는 산성이라고 한다.

공산성을 오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 서문 앞이 있는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금서루로 올라가 성 안으로 들어가는데, 금서루(錦西樓)는 조선시대의 성문 양식 따라 1993년에 축조되었다.

또한 매년 4월에서 10월까지 주말에는 웅진성을 수호했던 군사들의 근무 교대식과 더불어 다양한 백제문화 체험행사를 금서루 일원에서 펼쳐진다고 한다.

 

< 금서루로 올라가는 길에 세워진 "공덕비" >

 

금서루 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산책길이 4개의 길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길은 성내를 가로질러 만들어진 숲속 길, 둘째 길은 성곽 오른편 따라 성곽길을 걷는 길, 세째 길은 성곽 왼편 따라 성곽길을 걷는 길, 넷째는 바로 직진하여 백제 문화 체험장으로 내려가는 길로 나눈어진다.

 

< "백제 문화 체험장" 으로 내려가는 길 >

 

그런데 성곽 왼편 따라 걷는 세째 길은 공사로 인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젖한 풍경이 있는 길을 걷기 위하여 첫째 길 따라 산성을 가로 질려 만들어진 완만한 숲속 길로 걷는 것이 일반적이다.

 

< 산성 내부로 걷는 "숲속 길" >

 

그러나 우리 일행은 두번째 성곽 오른편 급경사 길로 방향을 잡아서 올라가는데, 이렇게 고난도의 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단숨에 공산성 주변에 펼쳐지는 조망을 구경하고푼 마음의 발로이다.

 

< "금서루" 오른편 성곽 따라 올라가는 급경사 길 >      

 

< 서서히 펼쳐지는 "공주시가지" 전경과 주차장 >      

 

급경사의 성곽길에는 송산리 제6호 고분군 벽화에서 발굴되어진 "사신도" 그림의 깃발이 나붓끼고 있는 옆으로 하여 성곽 길로 조금 올라가면, 이내 평탄한 길로 연결 되므로 트레킹의 진수를 느끼면서 걷는 길이 된다.

 

< 급경사의 성곽길을 걷는 Wife와 아들 및 "사신도" 깃발 > 

 

몇 번의 구비 구비를 돌아서 올라가면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이곳 공터가 웅진 백제 왕궁이 있었다는 추정이 되는 장소이면서 터의 뒤면 야산 위에는 쌍수정이라는 정자가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 굴곡진 지형 따라 만들어진 "성곽길" >

 

< 공주시가지 위로 저물고 있는 "태양" >

 

쌍수정은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1624년)을 피해 공주로 잠시 피난 왔을 때, 이곳에 머물었던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누각으로 인조는 난(亂)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신이 기대었던 두 그루의 나무에 "통훈대부(通訓大夫)" 라는 벼슬을 내렸고 이 산성을 "쌍수산성(雙樹山城)" 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영조 10년(1734년)에 쌍수가 있었던 자리에 정자를 지은 것이 현재의 "쌍수정(雙樹亭)" 이라고 한다.

 

< 조선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쌍수정" >

 

넓은 왕궁터 끝지점에 깊은 연못이 자라잡고 있는데, 연못의 모양이 원뿔형으로 돌을 차곡차곡 쌓여 만들었으며 연못 위면 원의 지름이 약 7.3m에 바닥면 지름 4.78m, 깊이 3m의 거대한 연못이다.

 

< 추정 왕궁터 가장자리에 있는 "고목 나무와 연못" >

 

< 자연석을 쌓은 "원뿔형 연못" 내부 >

            

이 왕궁터에서 부터 약간의 내리막 길로 내려가면 진남루(鎭南樓)의 루각 건물이 만나는데, 진남루 건물은 1층으로 건랍돠었지만 계곡과 계곡을 연결하는 다리 위에 건설하므로 2층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문으로 그 시대에는 삼남(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관문이 된다.    

 

< 공산성 남쪽을 지키는 "진남루" >

 

<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진남루" 전경 >

 

이 진남루를 통과하여 계속적으로 동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또 다시 영동루(迎東樓)를 만나는데, 영동루는 공산성의 동쪽에 있는 루각으로 사각형과 같은 돌로 된 문과 한국 고유의 기와지붕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인접하게 진남루와 광복루 사이에 있다.

 

< 한국 고유의 기와지붕과 같은 "영동루" > 

 

이 영동루에서 또 다시 야산을 조금 올라가면 공산성의 동쪽 최고 높은 해발 110m 지점에 광복루를 만나는데, 광복루는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중군영(中軍營)의 문루로써 원래는 웅심각(雄心閣)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러나. 1946년 광복 이후 백범 김구 선생님과 성재 이시영 선생님이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광복루(光復樓)" 로 고쳐 불렸다고 한다.

 

< 공산성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광복루" >

 

여기 광복루에서 바라보는 금강의 모습과 건너편 넓은 평원이 펼쳐지고 있는 풍경을 구경하다가 빠르게 내려오는 어둠으로 천천히 발길을 돌려 아래로 조금 내려가면, 임류각(臨流閣)과 명군삼장비(明軍三將碑)가 자리잡고 있다.

 

< 광복루에서 바라보는 "금강" 풍경 >

 

임류각은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500년)에 지어진 루각으로 신하들과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장(丈)이며 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렸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고 한다.

 

< 광복루 바로 아래에 있는 "임류각" >

 

그 옆에 있는 명군삼장비는 정유재란이 끝난 후, 공주에 주둔하던 명나라 세명(이공, 임제, 남방위)의 장수가 왜군의 위협으로 부터 주민을 보호하여 준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碑)라고 한다.

 

< 3명의 명나라 군인을 기리는 "명군삼장비" >

 

그 임류각 왼편으로 낙옆에 깔려있는 넓은 공터가 여러 곳 만들어져 있는데, 이 공터에는 백제의 군사들의 훈련하는 곳과 장군이 지휘하는 장대소라는 장소가 만들어져 있다.

 

< 훈련하는 백제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소" >

 

임류각에서 다시 성곽 가장자리로 만들어진 급경사의 내리막 길 따라 금강 변까지 내려가면 만하루와 연지를 만나는데, 이 만하루는 조선 영조 30년(1754년)에 건축된 루각이지만 소실하여 1984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만하루는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반 루각과는 달리 군사적 기능도 겸비하고 있는 루각이며, 그 앞에 있는 연지는 백제시대 연못 터로 9m 아래 바닥까지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어 물을 기르기에 편리하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 금강변에 있는 "만하루와 연지" 모습 >

 

이 만하루 뒤편으로 "영은사(靈隱寺)" 라는 사찰이 자리잡고 있는데, 영은사는 조선 세조 4년(1458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승병의 훈련소로 사용된 장소이라고 한다.

 

< 영은사의 본찰 "원통전" >

 

< 영은사 원통전 앞에 있는 "관일루" >

 

금산 전투를 치른 승병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조선 광해군 때 영은사에 승장(僧將)을 두어 8도의 사찰을 관장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고 한다.

이 영은사 앞에 거대한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은행나무에 떨어져 있는 노란색의 잎과 열매가 지천으로 떨어져 있어 깊어가는 가을 경치를 나타내고 있어 어둠이 내리고 있는 풍경과 함께 쓸쓸함이 묻어난다.

 

< 영은사 마당에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 >

 

이 영은사 사찰에서 부터 공산성 출발지점의 금서루 까지 성곽 보수공사를 하므로 출일을 금지한다는 펫말이 있으나, 다시 산성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서 갈려고 하니 너무나 늦으므로 공사 안내문 무시하고 계속하여 성곽 따라 걸어 공북루에 도착한다.

공복루는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로써,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루로 조선 선조 36년(1603년) 옛 망북루 터에 다시 건축하여 "공북루(拱北樓)" 라고 고쳐 불려졌다고 한다.

성문 아래로 금강이 흐르고 있어 문루 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최고의 풍경을 만들고 있다고 하나, 성곽 공사로 문루 출입을 차단하고 있어 가까이 접근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 공사로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공북루" >

 

여기에서 완전하게 한바퀴의 성곽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다시 높은 언덕 길로 올라가 공산정(公山亭)으로 돌아서 금서루로 내려가야 하는데, 공사로 인하여 완전이 길이 파괴하므로 공복루 앞에 있는 넓은 공터를 가로 질려 네번째 길의 백제 문화 체험장 방향으로 통과하여 원점의 금서루로 질려가야 한다.

 

< 언덕 위에 있는 "공산정" >

 

이렇게 하여 다소 늦은 시간까지 공산성 전체 한바퀴를 구경하고 공산성을 벗어 나니, 완전이 어둠이 내리면서 성곽 주변에 야간 조명등이 켜지면서 또 다른 풍경을 만들고 있다.

 

< 금서루에 "조명등" 이 켜지고 >

 

아울러 금서루 앞에 있는 공주시가지도 아름다운 야경 풍경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뒤로 하면서 짧은 시간 바람과 같이 박물관과 유적지를 구경하는 강행군이 이루어지는 여행이다.

 

< 금서루 앞에 있는 "시가지" 에도 어둠이 내리고 >

 

당일로 공주시가지 전반을 관광하고 나서 대구로 내려오는 길의 중간지점 고속도로 한 휴게소로 들어가 휴식과 함께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끝내고, 무사히 집에 안착하는 하루가 된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