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박물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으면서 국립 중앙박물관과 함께 하고 있는 '국립 한글박물관' 의 관람.

용암2000 2018. 8. 26. 18:46

일곱째 날.(2018년 8월 5일 : 일요일)

 

1. 국립 한글박물관의 관람.(오전)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아파트 인근에 있는 콩나무 해장국 식당으로 들어가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경춘선 기차를 이용하여 서울로 달러가는데, 상봉역에서 경의중앙선을 이용하여 이촌역에 내려 국립 중앙박물관을 찾아간다.

국립 중앙박물관 정문에서 조금 앞으로 걸어가면 3거리 이졍표를 만나는데, 이곳 3거리 이정표에서 왼편 방향으로는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길이 되고 직진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면 '국립 한글박물관' 으로 가는 길이다.

 

< '국립 한글박물관' 을 가르키고 있는 화살표 >

 

나는 2013년 4월 9일 서울에 거주하는 고등학교 동문과 함께 국립 중앙박물관을 관람한 경험이 있으므로, 오늘은 한글박물관을 먼저 관람하고 시간이 허락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구경하는 방향으로 결심하여 본다.  

벌써 강력한 햇살로 땀으로 번벅이 되는 얼굴을 하면서 시멘트 포장길 따라 조금 걸어가면 국립 중앙박물관의 오른편 구석자리에 독특한 외형을 가지고 있는 국립 한글박물관을 만난다.

 

< 국립 중앙박물관 한쪽 구석에 있는 '국립 한글박물관' 건물 >

 

국립 한글박물관은 지하 1층 및 지상 4층의 건물로 되어 있으면서 지상 1층과 4층은 강의실 및 사무실로 사용하고 2층과 3층은 전시실로 활용하고 있는데, 2층에는 상설전시실로 운영하고 3층에는 기획전시실로 운영하고 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데 계단과 더불어 옥외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편리하게 2층에 도착하여 로비로 들어가면, 왼편에는 휴게실과 더불어 각종 서적 및 기념품을 판매하는 매점으로 꾸며져 있다.

 

< 2층 로비 왼편에 있는 '휴게소' >

 

< '서적 및 기념품' 을 판매하는 매점 >

 

휴게소는 어린이를 동반한 많은 학부모들이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있고, 반대가 되는 오른편 상설전시실 입구에는 안내원 한명이 서서 반가운 인사와 함께 관람의 코스를 인도하여 준다.

국립 한글박물관은 세종대왕의 애민(愛民)정신을 계승하고 한글의 문화적 가치와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개관하여 올해 5년차가 되어지는데, 년간 방문객 수가 60만명 이상 찾아들고 있는 박물관이 되어진다고 한다.  

전시실 입구에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학부모와 함께 많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한글의 중요성을 알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지방에도 이렇게 다양한 박물관을 건립하여 자라나는 새싹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켜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여본다.

 

< 오른편 '상설전시실' 로 들어가는 입구 >

이곳 국립 한글박물관은 한글의 지나온 역사를 실물과 더불어 자료 중심으로 재조명하는 공간으로써, 오늘날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는 한글 문화의 다양성과 문자로서의 미래를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곳이라 하겠다.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영상실이 자리하고 있어 먼저 영상실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영화 한편을 구경하여 보는데, 영화의 내용은 한글을 창제할려고 하는 세종대왕과 한글 만들기를 반대하는 신하와의 격론장이 펼쳐진다.

 

< '영상실' 로 들어가는 입구 >

 

이어 메인 전시실로 입실을 하면 전시실은 3개의 섹션(Section)으로 구획하고 있는데, 제1섹션은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라는 주제를 각종 전시품과 더불어 설명문을 통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알게 한다.

 

< 제1섹션 입구에 있는 '한글' >

 

한글은 세종대왕 25년(1443년)에 '훈민정음(訓民正音)' 이라는 이름으로 창제(創製)가 되어지는데, 한글은 세종대왕이 백성들의 문자 생활에 불편함을 딱하게 여겨 만든 애민정신의 산물이라 하겠다.

 

< '세종대왕' 과 훈민정음 >

 

또한 한글은 현대 언어학(言語學)의 관점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제자 원리(制字 原理)를 갖추고 있으며, 당시의 성리학적 세계관과도 부합하면서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를 적는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은 문자사적(文字史的)으로 길이 빛날 독창성(獨創性)과 과학성(科學性) 원리를 갖고 있어, 세계의 언어학자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 문자이다.

 

< '주시경' 선생님과 한글 >

 

벽면 따라 관람을 하여 보면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을 비롯하여 월인석보, 천로역정, 청구영언 등 책을 쓴 사람과 더불어 내용을 요약한 내용들이 붙어있지만, 너무나 많은 내용으로 인하여 전부를 읽어 보기에 역부족이 되어져 중요한 부분만 대충 추려 사진으로 남겨 본다.

 

< 벽면 따라 전시하고 있는 '책 과 설명문' >

 

< 훈민정음 '해례본' 의 구성 >

 

< 전시하고 있는 '책' >

 

< 전시하고 있는 '월인석보' >

 

특히 한글이 없었던 시절의 문자로는 한자의 음(音)이나 뜻을 활용하여 우리말을 쓰고 있었는데, 이것을 차자 표기법(借字 表記法)이라고 하며 초기에는 지명이나 인명 등의 고유 명사를 적는데 차자 표기를 사용하였지만 이후에 이두(吏讀), 향찰(鄕札), 구결(口訣) 등이 만들어지면서 하나의 어휘를 넘어 문장을 나타낼 수 있었다고 한다. 

 

< 한글이 없었던 시절의 '문자' >

 

차자 표기 방식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꽤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특히 이두는 조선후기 까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한글이 새로운 문자로 창제되었어도 상당 기간 동안 차자 표기가 존속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 '이두' 의 설명문 >

 

< '향찰' 의 설명문 >

 

< '구결' 의 설명문 >

 

내부로 들어가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놈들이 한굴 말살 정책으로 인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노력한 애국지사와 더불어 한글학자의 피 눈물 나는 결실을 보여 주고 있는데, 많은 교훈을 얻게하여 준다.

제2섹션으로 들어가면 '쉽게 익혀서 편히 쓰니' 이라는 주제로 전시실을 활용하고 있는데, 한글의 모습과 더불어 교육, 종교, 생활, 예술, 출판, 기계화 등 각 분야에서 한글이 보급되고 확산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 '제2섹션' 의 전시실 전경 >

 

< 서포 김만중 선생님이 쓴 소설 '구운몽' >

 

또한 고종 31년(1894년)에 한글이 국문의 지위를 얻은 과정과 더불어 여러 한글 단체 및 학자들이 이룬 한글 연구 결과와 당시의 한글 교육 자료를 소개하고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여 준디. 

 

< 다양하게 출판한 '춘향전' >

 

힌글을 처음으로 타이핑으로 칠 수 있도록 개발하면서 한글 과학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신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와 더불어 초기 개발되어진 타자기를 진열하고 있는데, 현재와 같이 표준화가 되기전 까지 개발자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 처음 개발한 한글 '타자기' >

 

옆에 있는 제3섹션으로 들어가면 한글이 1894년 조선의 공식문자로 선언 되고 1907년에는 한글을 연구하는 국립 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설립되지만,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한글 연구는 물론이고 우리말과 한글 사용이 전면 금지가 된다.

 

< 해방 후 사용한 '국어' 책 >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도 국어학자들과 국어 연구 단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우리말과 한글을 지킬 수 있는 튼튼한 뿌리가 되어졌고, 현대의 한글은 단순한 문자를 뛰어넘어 문화 전반으로 생활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 세계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브랜드' >

 

< '뇌파' 로 시현하여 보는 어린이 >

 

이상과 같이 상설전시실을 돌아보고 나서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가지고 나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여 3층으로 올라가서 기획전시실로 들어가 관람하기로 한다. 

금일 기회전시실에는 인간의 인체에 대한 해부학(解剖學)을 공부할 수 있는 '나는 몸이로소이다' 라는 주제로 전시하고 있는데, 내부로 들어가니 전체가 의료에 관련되는 학문이라 무척 난이한 전시실이 된다.

 

< 3층 '기획전시실' 로 들어가는 입구 >

 

전시실 곳곳에 인체의 그림 또는 신체의 일부분을 전시하면서 설명을 하고 있지만 너무나 어려운 의학(醫學) 지식이라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이동하는데, 그 중에 동양의 3국이 되는 일본과 중국 및 한국의 해부학 도입기에 대한 설명에 관심을 가져본다.

 

< '기획전시실' 내부 전경 >

 

< 초기 '해부' 용 으로 사용한 도구 >

 

일본은 17세기 네델란드를 통하여 근대 서양의학(西洋醫學)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 중반 부터 실제 해부학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서양의 해부학 서적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 일본 의술용 '해부도' >

 

< 일본 최초의 '인체 해부도' >

 

중국도 서양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펴낸 서적으로 부터 서양의학에 관련되는 내용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마테오 리치' 선교사가 선교 활동을 통하여 1595년에 발간한 '서국기법' 에서 해부학 관련한 내용을 기술하였다고 한다. 

 

< 중국의 '인체 해부도' >

 

한국은 일본과 중국보다 2-3 세기나 늦게 19 세기 말에 서양식 의료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하였는데, 도입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칼에 찔려 생명이 위독한 개화파 '민영익(閔泳翊)' 선생님을 의료 선교사 '알렌' 이 외과 수술로 치료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의 설립을 제안하므로 인하여 고종은 이를 받아 들이는데, 1885년 최초로 서양식 병원이 되는 '제중원(濟衆院)' 을 세웠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되는 제중원은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외과 치료가 빛을 발하면서 세워졌으며 1886년에는 제중원 의학교가 설립되어 환자 치료와 조선인 의사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제중원이 현재의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가 된다.

 

<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 되는 '제중원' >

 

< 년도별 '한국 해부학' 변천사 >

 

이 밖에도 신체의 각 부분의 모형과 더불어 장기별 역활을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제는 노후로 인하여 건강에 대하여 더욱더 호감이 가는 부분이 많아 다소 많은 관람시간이 지나간다.

 

< 각종 '의료 기구' 를 구경하는 관람객 >

 

장시간 관람으로 인하여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기획전시실 앞으로 '어린이 체험실' 과 외국인을 위한 '한글 배움터' 가 마련되어 있어 잠깐 들어가 관람하여 보는데, 이곳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놀이를 겸하는 체험이 이루어지고 있어 매우 유익한 장소가 되어지는 것 같다.

 

< 기획전시실 앞에 있는 '어린이 체험실' >

 

< 외국인을 위한 '한글 배움터' >

 

< 중앙박물관 앞에 있는 '거울못' >

 

매우 늦게 까지 관람을 끝내고 나서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 나와 중앙박물관으로 올라가 박물관 별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황금문명 엘도라도' 라는 기획전을 관람하기로 하는데, 관람하기 전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거울못 옆에 있는 거울못 식당으로 들어가 성대한 점심식사의 시간을 가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