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일기.

백제시대 스캔들의 중심지가 되며 무왕 발자취가 서려있는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지" 방문.

용암2000 2014. 8. 13. 16:37

2. 둘째날 (8월 2일 : 토요일)

 

3) 백제 무왕의 발자취가 있는 미륵사지 방문. 

 

김제에서 익산으로 올라가는 국도를 이용하여 약 1시간 정도 달려가면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미륵사지 주차장에 도착하면서, 주차장 옆에 있는 안내소로 들어가 안내 팜플렛 한장을 취하면서 안내원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어 본다.

이곳 익산에는 백제 무왕에 관련 되는 유적지가 여러 곳 자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무왕이 성장한 오금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인접하게 있는 왕궁리유적(王宮里遺跡), 무왕의 무덤이 있는 쌍릉(雙陵)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 "익산시" 가 보유하고 있는 유적지 조감도 >

 

익산에 꼭 보아야 하는 명소(名所)로는 무왕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미륵사지 및 왕궁리유적과 더불어 보석 테마관광지를 뺄 수가 없는 관광지가 되므로 반듯히 방문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준다.                                                                                               

그러면서 이곳 미륵사지 및 왕궁리유적지에는 전문 해설사가 상주하면서 해설하여 주므로, 세부적인 내용은 관람과 더불어 해설을 경청하기 바란다고 하면서 미륵사지 정문까지 배웅하여 준다.

 

< "미륵사지" 로 들어가는 정문 >

 

미륵사지 정문에서 부터 넓은 보도 Block 위를 걸어서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으로 들어가니, 한 해설가 수 많은 고등학교 학생들을 인솔하면서 미륵사지에서 출토되어진 유물 앞에서 해설하고 있어 뒤편에 서서 함께 공부하여 본다.

 

<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건물 전경 >

 

이곳 미륵사를 건립한 백제 무왕은 제30대 왕으로 서기 600년에서 641년 까지 41년 간 재위한 왕으로, 재위 599년에서 600년 까지 단지 2년 만에 사망한 제29대 "법왕" 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무왕의 출생과 관련하여는 여러가지 기록들이 전하여 지고 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에 따라 법왕의 아들로 보는 견해와 "삼국유사" 무왕조 기록에 따라 몰락한 왕족 출신으로 보는 두 가지 견해로 주목된다.

삼국유사 무왕조 기록에 의하면 백제 무왕의 출생 비밀은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왕경이 되는 부여 남쪽 연못 가에서 집을 짖고 살면서 연못에서 살고 있는 지용(池龍)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로써, 이름을 "장(璋)" 이라 하였으며 그 장은 제주와 더불어 도량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린 장은 익산 오금산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마를 캐다가 시장에 판매하는 것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하여 "서동(薯童)" 이라고도 불려졌는데, 서동은 적국(敵國)의 신라 왕경이 되는 경주로 들어가 "서동요" 라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면서 선화공주를 아내로 만들어 백제로 돌아온다고 한다.       

이렇게 선화공주와의 Love stroy 까지 만들면서 적국의 공주를 아내로 만든 보통의 인물이 아니라고도 표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서 확인된 "사씨" 왕비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무왕의 출생 실체에 대한 비밀이 너무나 많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무왕은 41년 간의 재위기간 중 부여의 서쪽에 있는 미륵산 중터에 있는 "사자사(師子寺)" 라는 사찰에 있는 지명법사에게 불공을 드릴려고 왕비와 함께 찾아가다가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한다.

그래서 왕비가 이곳에 사찰을 세우기 갈망하므로 무왕은 연못을 메우고 미륵삼존불의 상(像)을 만들었으며, 한편으로 탑과 회전(會展) 및 랑무(廊廡)를 각각 3곳에 세우면서 사찰 명칭을 "미륵사(彌勒寺)" 라 하였다고 한다.  

 

< 탑, 회전, 랑무 등 3 곳으로 구획하여 건립되어 있는 "미륵사" 모형도 >

 

< 미륵사 중앙에 있는 "목탑" 모형도 > 

 

< 미륵사에 사용한 "건축 부재" >

 

그 후 미륵사는 조선시대에 소실되어 미륵사지만 남아 있었는데, 미륵사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처음 조사되었으며 우리나라 문화청에서 1980년 부터 약 17년 간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약 19.363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현재 이곳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 미륵사지 서탑 아래에서 발굴한 "사리외함" >

 

< 미륵사지에서 발굴한 "은제품" >

 

< 미륵사지 내에서 발굴한 "토기" >

 

해설사 따라 이야기를 계속하여 경청하기를 원하였지만, 학생들의 시끄러운 소리로 인하여 해설의 듣기를 중지하고 먼저 앞으로 나아가 횡하니 한번 돌아보고 밖으로 나와 미륵사지를 구경하기 위하여 언덕으로 올라가 본다. 

미륵사지의 배치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한기의 석탑이 있고 중앙에 목탑이 있었으며, 각 탑 뒤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 건물이 3곳에 각각 자리하고 있으면서 각 대웅전 건물은 화랑이라는 복도로 구획되어 매우 특이한 사찰의 배치를 하고 있다.

이와같이 3탑 3금당(대웅전)의 가람배치 형식은 미륵불이 용화 보리수 나무 아래에 성불한 모습을 가람으로 구상화 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백제문화의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천천히 잔디광장을 통과하여 미륵사지 중앙으로 들어가면 미륵사지 중앙에 보물 제236호의 당간지주가 서 있으면서, 그 당간지주 뒤편으로 국보 제11호 "서탑" 을 해체 보수하기 위하여 거대한 가설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에 있는 동탑은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흰색의 새로운 탑으로 거듭 탄생하여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 미륵사지 중앙 정도에 있는 "당간지주" >

 

< 당간지주 뒤편 서탑을 복원하기 위하여 지어진 "가설건물" >

 

< 가설건물 오른편 새롭게 복원한 "동탑" >

 

가설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서탑이 완전히 해체되어 주변으로 석돌을 쌓아두고 있으며 바닥에는 탑이 앉아 있었던 자리에 기초석(基礎石)을 놓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에 있고, 가설건물 주변으로 해체하기 전의 탑의 모습과 탑에서 발굴하여진 유물에 대한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 새롭게 복원하고 있는 "서탑 가설건물" 내부 모습 >

 

이 서탑은 일본인들이 더 이상의 파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한쪽 면에 세멘트로 발라놓아 흉물스럽게 방치하면서 관리하였는데, 관광객들이 세멘트로 발라놓은 탑의 상부까지 올라가 사진을 찍고 있는 풍경의 그림도 전시하고 있다.

 

< 세멘트로 발라놓은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서탑" >

 

이곳 서탑은 현존하는 한국의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탑이며 한국 석탑(石塔)의 시원(始原) 양식으로서 목탑(木塔)에서 석탑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매우 중요한 탑이지만, 오늘 볼 수가 없어 애석함이 묻어난다.

원래 이 석탑은 9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는 6층 까지 남아 있으며, 2001년 부터 국립문화재 연구소에서 해체 조사 및 보수 정비를 추진하므로 언제 완성된 모습을 대면할지 궁궁하여 진다.    

2009년도 조사를 통하여 탑의 1층 중심 기둥 상면의 사리공에서 사리 정엄구가 발굴되어 탑의 조성 배경과 시기를 알 수 있게 하였으며 사리 봉함의 배경을 적어 놓은 사리 봉영기에는 앞과 뒤면에 193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기해년(己亥年) 629년에 백제 무왕의 왕후가 왕실의 안녕과 기원을 위하여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사리봉영기" 에 쓰여 있는 글씨 >

 

이 미륵사를 건립한 당시의 왕후는 좌평 "사탁적덕(沙托積德)" 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선화공주와 다른 인물이 되므로 무왕의 출생 배경과 왕위로 등극하는 모든 과정에서 미스테리가 발생하는 왕이다.

가설건물 뒤편으로 나오면 거대한 사찰 부지가 해발 430m "미륵산(彌勒山)" 품에 앉기면서 곳곳에 건물 기초석이 놓여 있어 가람의 크기를 짐작하게 만들고 있으며, 오른편으로 넘어가면 사찰 중앙이 되는 목탑이 있었던 자리가 있고 더 오른편으로 9층의 동탑이 자리하고 있다.

 

< 해발 430m "미륵산" 아래에 있는 미륵사지 터 >

 

이 동탑은 서탑의 사진과 역사적 고증으로 건립되므로 매우 웅장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운 탑신을 쌓았으며 기둥은 밑이 넓고 위가 좁아 안정감이 묻어난다.

 

< 새롭게 복원 완료한 9층 "동탑" >

 

탑의 외형 모습은 기둥, 벽면, 처마, 지붕 등의 전체적인 형식과 외형적인 모습은 목조 건물과 비슷하고 지붕은 평탄하면서 끝에서 곡선을 이루고 있어 매우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으며, 탑의 1층에는 사방으로 출입구를 만들고 있으며 내부 중앙에는 중심 기둥이 탑신 전체를 받치고 있다.

이 동탑 앞에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되어진 수 많은 석재물(石材物)이 진열하고 있고 그 석재물 앞으로 내려가면 2개의 아담한 연못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연못은 아마 미륵사를 건립하기 위하여 연못을 매립하면서 남은 일부분인 것 같다.

 

< 미륵사지에서 발굴한 "석재물" >

 

< 미륵사지 제일 앞에 자리하고 있는 "연못" >

 

미륵사지 곳곳을 돌아보고 있는 사이 갑작스러운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하므로 더 이상 야외 관람이 불가능하므로 미륵사지를 떠나 다음 여행지로 발길을 돌린다.

 

4) 왕궁리 유적전시관의 관람.

 

미륵사지에서 동쪽으로 10여 분 정도 달려가면 백제 무왕이 천도(遷都) 할려고 하였던 "왕궁리 유적지(王宮里 遺跡地)" 를 방문하여 보는데, 이 왕궁리 유적지는 1989년 부터 21년 동안 발굴 및 조사한 결과에 따라 백제 무왕 시절 왕궁으로 건립되어 경영하다가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되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유적지 옆으로 유적지의 땅 보다 많이 높은 고가 형태의 1번 국도가 달려가므로 유적지 정문이 도로의 둔둑으로 인하여 푹 꺼진 형태를 하고 있어 매우 답답한 장소에 정문이 자리하고 있으며, 정문 입구에는 높은 입석과 함께 옛 유럽식 모양의 안내문이 자리하고 있지만 개미 새기 한마리 얼씬도 하지 않고 적막감이 흐른다.

 

< "1번 국도" 의 높은 도로 둔둑 아래에 있는 왕궁리 유적 >

 

< "왕궁리 유적전시관" 을 알리는 입석 >

 

유적지로 들어가는 차단기를 통과하여 오른편으로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지만, 한대의 차량도 없어 내부로 들어가 유적전시관 옆에 있는 도로 변에 승용차를 세우고 전시설로 들어가 팜플렛과 함께 관람 안내를 받아본다.

 

< "왕궁리 유적" 전시관 건물 모습 >

 

전시관에서는 왕궁리 유적의 발굴조사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하면서 왕궁리 유적에 대한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의 체험실에는 백제 기와를 관람객에게 직접 만져보면서 기와 제작과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왕궁리 유적" 전시장의 내부 모습 >

 

< "유적전시실" 로 들어가는 통로 >

 

이곳 왕궁리 유적지에는 백제 무왕이 무슨 근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여에서 이곳으로 천도를 하기 위하여 왕궁을 조성하였지만, 끝내 도읍으로써 역활도 하지 못하고 왕궁을 헐어내고 사찰로 변모한 곳이라고 한다.

왕궁리 유적지는 우리나라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함께 왕이 정사(政事)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政殿) 건물지를 비롯한 14개의 백제 건물지와 백제 정원 유적,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였던 공방지,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 화장실 유적 등이 조사되어 왕궁의 축조 과정과 왕궁에서의 생활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하고 있다.

 

< 왕궁리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 >

 

< 왕궁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석재" >

 

< 왕궁리 유적지에서 발굴한 대형 "변소" >

 

전시 유물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 중 300여 점을 선정 및 전시하고 있는데, 왕궁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금제품, 유리제품, 수부(首府)명 인장와, 전달린 토기 등과 함께 연화문 수막새, 인장 기와 및 토기류, 금과 유리제품을 생산했던 도가니 등이 전시하고 있다.

 

< 왕궁리 유적지에서 발굴한 "토기" >

 

< 궁궐에서 배푼 "연회석" 모형 >

 

왕궁리 터가 전시관 정문 옆면으로 펼쳐지므로 밖으로 나와 터를 관람하여 보는데, 왕궁리 터는 용화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의 남쪽 끝부분 해발 40m 내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릉을 깍아 내리거나 낮은 곳은 흙을 쌓아 평탄 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왕궁을 조성하였다.

 

< "왕궁리 터" 로 넘어가는 입구 >

 

왕궁의 외곽을 둘러싼 담장은 잘 다듬어진 사구석과 장대석, 깬돌을 사용하여 폭3m 규모로 만들었는데,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남측 담장은 잘 다듬어진 사구석과 장대석으로 정성들여 만들었다고 한다.

왕궁의 규모는 남북 490m에 동서 245m로 약간 틀어진 긴 네모꼴이며, 담장의 아래 안쪽과 바깥쪽에는 폭 1m 정도로 평평한 돌을 깔아 홍수에 의해 담장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 보도(步道)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시설은 작업 진행과정에 있어 최종 마무리 단계의 시설로서 백제 왕궁이 완전한 형태로 완성된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물증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왕궁이 사찰로 변모한 이유는 확실하게 고증 할 자료가 없지만, 다만 무왕과 왕후의 사후 익산 쌍릉(雙陵)에 모셔 짐에 따라 무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나 아니면 백제 멸망 후 무왕 세력의 결집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파과하였다고 추정할 뿐이라고 한다.

사찰로 변경한 시기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금마군의 대관사 우물이 핏빛이 되어 5장이나 흘렸다" 라는 기록으로 보면 의자왕 시대의 전후(前後)로 하여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유적지 입구로 올라가면 입구에는 사적지 조감도를 비롯하여 출품되어진 유물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더 위로 올라가면 국보 제289호 "왕궁리 5층석탑" 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석탑 안에는 19매의 금제강 경판과 사리 장엄구가 수습되어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왕궁리 유적지 입구에 있는 "조감도" >

 

< 국보 제289호 "왕궁리 5층석탑" >

 

< 왕궁리 5층석탑에서 발굴한 "유물" >

 

이 왕궁리 5층석탑 뒤편으로 넓은 발굴지가 펼쳐지고 있는데, 이 발굴지에는 총 21기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으며 그 중 백제시대의 건물지가 14기,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가 6기, 고려시대의 건물지가 1기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시대 건물지 중에 제1 석축 바로 앞에 왕궁의 정전 또는 중요 건물로 사용한 동서 32m와 남북 16m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이 건물지에는 왕궁 내에서 가장 큰 규모로써 건물의 남북 중심축이 남측 중문의 중심축과 일치하여 왕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지가 되어진다고 한다.

 

< 아직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왕궁리 유적지" > 

 

아직 조사 및 복원 단계에 있는 유적지 이므로 내리는 비로 인하여 더 이상 관람이 불가능 하여 석탑의 가장자리에 서서 유적지 전체를 한번 돌아보는 것으로 끝으로 왕궁리 유적지를 떠나는데, 이곳 익산이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알게하여 준다.  

 

5) 익산 보석테마관광지 구경.

 

ㄱ) 보석박물관 구경.

미륵사지 안내원이 강력하게 추천하여 주는 익산의 또 다른 명소 중에 하나 익산 "보석테마관광지" 를 돌아보기 위하여, 다소 강력하게 내리는 빗속을 뚫고 왕궁리 유적지 인접지역에 있는 보석테마관광지로 달려간다.

보석테마관광지 내에 중요 관광지로는 보석을 상시 관람할 수 있는 보석박물관과 더불어 보석박물관 뒤편으로 화석전시관 및 공룡테마공원이 별도로 자리하고 있으며, 박물관 건물과 연결하여 국내 최대 귀금속 판매 센터인 "주얼팰리스" 건물, 이 밖에 각종 위락시설로 구획하고 있다.

 

< 익산 "보석테마관광지" 조감도 >

 

이곳에 있는 보석박물관은 보석의 도시 익산(益山)의 상징으로써 자리 매김하므로 무왕의 시대를 열었던 백제문화 유적지와 연계하여 관광자원으로서의 열린 문화공간으로 개발한 장소이라고 한다.

익산 보석박물관은 찬란한 금속문화를 이룩하였던 지역의 특화산업인 귀금속(貴金屬) 가공산업의 우수성과 보석의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약 4만5천 평의 부지 위에 건립한 왕궁 보석테마관광지 내에 2002년 5월에 개관한 국내 유일의 보석박물관이라고 한다.

 

< "보석박물관" 으로 들어가는 입구 >

 

먼저 보석을 상시 전시하고 있는 보석박물관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트를 이용하여 2층에 있는 매표소로 직행하여 작은아들의 입장료 3.000원을 지불하고 보석 전시실 내부로 들어가 진열하고 있는 보석을 구경하여 보는데, 각 Booth 마다 화려하게 진열하고 있는 보석을 관람 할려고 하니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나의 신세가 초라하게 만든다.  

진귀한 보석과 화석 등 총 11만8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 규모의 박물관으로 그 명성에 걸맞게 보석의 탄생 과정부터 연마방법, 다양한 보석의 종류 등 보석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 및 학습, 교육의 장(場)으로써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입구로 들어서면 초대의 장에서 부터 역동의 장, 인식의 장, 감동의 장, 체험의 장, 결실의 장 등으로 탄광 또는 모래사장에서 원석을 채취하여 수 차례 가공공정을 통하여 보석을 제조하는 전 과정을 마네킹으로 만들어져 있어, 보석의 희귀성을 인식하게 한다.

 

< 보석박물관 전시장 입구에 있는 "초대의 장" Booth >

 

< 전시하고 있는 보석을 구경하는 "관광객" >

 

< 진열하고 있는 각종 "보석" > 

 

< 땅 속에 있는 원석 "수정" >

 

< 무리를 만들고 있는 "원석" >

 

< 포근함이 느껴지는 "백운모" >

 

< 착암기로 "원석" 을 캐는 모습 >

 

< 보석을 가공하는 "마네킹" >

 

각 Booth 마다 희귀하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보석들이 진열하고 있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게 하지만, 주어진 관람시간으로 발길을 빨리하면서 전시실을 주마간산 식으로 구경을 끝내고 1층으로 내려와 기회전시실로 이동한다.

 

< 전시하고 있는 각종 "원석" >

 

< 다양한 형상의 "보석" >

 

< 보석으로 만든 "조각품" >

 

< 바다 "어패류" 에서 생산하는 보석 >

  

< 보석으로 가공한 "문화재" 를 구경하면서 > 

 

<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보석꽃" >

 

기획전시실에는 우리나라에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국보급 문화재 중에서 희귀 금속으로 제작되어진 전시물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아, 전국에 분산하여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문화재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이곳에서 함께 구경이 가능하게 한다.

 

< "기획전시실" 입구에 있는 안내도 >

 

< "문화재" 를 복재하여 만든 전시물 >

 

< 다양한 "문화재" 의 복재품 >

 

< 미륵사지에서 출토한 "사리외함" 복제품 >

 

다른 한 코너에는 멀리 영국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복제품 유물을 전시하고 있어 더욱더 이색적인 보석을 대면할 수 있게 하므로 지금까지 알지 못한 희귀 보석을 관람하게 하지만, 관람의 마감시간 임박으로 관리인의 독촉으로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ㄴ) 화석전시관 구경.

이 보석박물관 뒤편으로 돌아가면 아담한 야산 위에 화석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어, 그 방향으로 올라가니 여기에도 관람시간이 지나갔으므로 문이 굳게 잠겨져 있으므로 주변에 있는 야외 공룡테마공원으로 들어가 본다. 

 

< 화석박물관 뒤편 "화석전시관" 으로 올라가는 길 >

 

< 관람 시간이 끝난 "화석전시관" >

 

야외 공원에는 한 때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한 대형의 공룡에 대하여 디오라마(Diorama)가 전시하고 있어, 공룡의 크기를 가름하면서 관람하여 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다.

 

< 야외 "공룡테마공원" 으로 들어가는 입구 >

 

< 거대한 크기의 "공룡" 모형 >

 

< 하늘의 지배자 "공룡새" >

 

ㄷ) 주얼 팰리스 방문.

다시 보석박물관 왼편으로 "주얼 팰리스(Jewel palace)" 가 자리하고 있어 그곳으로 이동하여 들어가 보는데, 이 주얼 팰리스에는 익산지방에서 생산하는 보석을 직접 고객에게 판매하는 장소이다.

 

< 생산자의 보석을 직접 판매하는 "주얼 팰리스" >

 

1층 45개 매장과 2층 20개 매장이 입점하여 진귀한 보석을 판매하고 있는데, 생산자가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가 이루어지므로 가격도 저렴하면서 다양한 모양의 보석을 준비하고 있어 예비 신혼부부가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 판매장에 진열하고 있는 "보석 코너" >

 

< 다양한 "시계" 를 판매하는 코너 >

 

< 고객을 기다리고 있는 "보석점" >

 

< 2층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보석 판매점" >

 

아무리 좋은 진주와 보석이 진열하고 있어도 빈털털이 신세인지라 견물생심(見物生心)의 마음만 가득 채우고, 6시 30분에 문을 닫기 위하여 준비하는 판매장을 떠나 내일의 관광지와 다소 안락한 잠자리를 위하여 대도시가 되는 전주로 달려간다.

 

6) 집으로의 귀환.

 

가랑비가 내리는 국도를 이용하여 전주시가지에 도착하여 출발할 때 전주 한옥마을로 들어가 먹어 볼려고 시도한 전주비빔밥을 먹기 위하여 한옥마을로 다시 방문하여 도로변 가장자리에 주차하고 거리를 구경하여 보는데, 다소 내리는 비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배회하면서 걷고 있어 매우 활기찬 거리가 된다.

젊은이와 함께 골목을 배회하면서 경기전을 지나 전동성당 까지 걸어가다가 다시 경기전 코너에 있는 전주비빔밥 식당으로 들어가 그렇게도 갈망하면서 기다린 비빔밥을 먹어보는데, 생각과 같이 그렇게 우수한 음식이 아니라 다소 실망을 가진다.

그러고 천천히 배회하면서 한옥촌 뒤골목으로 들어가 한옥체험을 하기 위하여 고옥(古屋)의 문을 두두려 보는데, 모두가 예약 완료되었다는 소리에 실망을 가지므로 전주에서도 새로운 모텔 촌으로 유명한 "아중역" 앞으로 가서 모텔을 찾으니 대부분 러브 모텔로 이루어져 있어 포근한 잠자리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처음 여행 계획은 2박3일로 예정하였지만 접근하는 태풍으로 더 이상 관광에 대한 의미가 떨어지므로 밤 10시 경 전주 아중역에서 출발하여 아들과 교대로 강력하게 쏫아지는 빗속에서 안전 운전하여 다음날 새벽 1시 경 집에 도착한다.-전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