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문화 및 박물관.

비화가야가 숨쉬고 있는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박물관 및 주변 유적지" 를 관람하고 나서.(2)

용암2000 2015. 1. 7. 00:05

2015년 1월 4일.(일요일)

 

2. 수구레 국밥.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과 같이 배가 고파 오므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하여 창녕공설시장 인접 지역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수구레 국밥" 을 먹어보기로 하는데, 나는 옛날 한번 먹어본 경험이 있지만 Wife와 작은아들은 이름도 처음 들어 본다고 한다.

 

< "수구레 국밥" 을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식당 >

 

수구레 국밥은 소의 가죽 아래 부위에 있는 기름 덩어리와 선지를 이용하여 국밥을 만든 것으로 2011년도 10월 KBS 예능 프로그램에 방영하므로 창녕지역의 별미가 되는 대표 음식이라 하겠다.

이미 만들어 놓은 국밥이라서 그런지 이내 밥상이 차려지므로 사진 촬영을 한장하고 있으니 옆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있는 지역 주민이 주인장 아주머니에게 수구레 국밥에 대한 내력(來歷)을 기술하여 홍보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지만, 주인장은 가격표에 적어 놓았다고 하면서 거절한다.

 

< 식당 벽면에 붙여져 있는 "수구레 국밥" 가격표 >

 

어찌하던 수구레 국밥은 대구에서 유명한 선지 국밥에서 몇 점의 돼지고기 대신 수구레 몇 점을 넣어서 만든 음식이라서 그런지 구수한 맛이 우수하지만, 질긴 기름 덩어리로 인하여 잇빨이 좋지 않은 나에게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된다.

 

< 독특하고 구수한 맛을 가진 "수구레 국밥" >

 

수구레는 옛날 한 때 무역 업체가 소를 많이 사육하고 있는 미국이나 호주에서 "우지(牛脂)" 라는 기름 덩어리를 공업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대량 수입하였지만, 라면을 제조하는 식품업체에서 식용의 튀김용으로 사용하므로 "우지파동" 이라는 큰 곤역을 치루어진 기름 덩어리가 되는 식재료(食材料)이다.   

 

3. 창녕 진흥왕순수비 관람.

식당 뒤편에 보물 제310호가 되는 창녕 "석빙고(石氷庫)" 가 자리하고 있지만 이곳 석빙고도 작년(2014년 1월 25일) 친구와 함께 관룡산 산행을 끝내고 창녕시가지를 구경하는 동안 돌아본 경험이 있어 관람을 생략하고, 창녕 진흥왕순수비를 구경하기 위하여 "만옥정공원(萬玉亭公園)" 으로 들어가 본다.

 

< "만옥정공원" 의 조감도 >

 

만옥정공원은 화왕산으로 올라가는 산행길의 들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면적 약 3천평의 도심공원인데, 공원 내에는 창녕 신라 진흥왕순수비와 창녕 척화비, 창녕객사, 퇴천 3층석탑, 창녕현감비 등 여러 유물이 자리하고 있는 공원이다.

공원의 제일 뒤편 언덕 위에 국보 제33호 "창녕 진흥왕순수비" 가 새롭게 단장한 정자 내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창녕 진흥왕순수비는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을 소풍 갔던 학생이 발견하였다고 한다.

 

< 화왕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진흥왕순수비" >

 

< 새롭게 단장한 정자 내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제33호 "진흥왕척경비" > 

 

1914년 2월 창녕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하시모토 료조" 에 의해 학계에 보고 되면서 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는데, 1924년 지금의 자리가 되는 만옥정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 "진흥왕척경비" 의 안내문 >

 

흔히 진흥왕순수비로 통칭하고 있으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 처럼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고 왕이 새로운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하므로 따로 "척경비(拓境碑)" 라고 불려진다.

비석(碑石)은 화강암의 자연 판석으로 높이가 178Cm에 폭이 175Cm, 두께가 30Cm 이며 전면을 약간 다듬어 400여 자의 글을 새겼고 비석의 모양에 따라 음각의 줄을 둘렸는데, 오른편 상부에서 부터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어 글씨는 왼편으로 갈수록 일행(一行)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글을 새겨져 있다.

 

< "진흥왕척경비" 전면 >

 

< "진흥왕척경비" 후면 >

 

다른 한편으로 도문화재 자료 제218호로 지정되어진 창녕 "척화비(斥和碑)" 는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백성들에게 서양세력의 침략을 더욱 강력하게 경고하고자 전국 중요 도로변에 세운 비석이다.

창녕에 남아 있는 척화비는 높이가 123Cm에 폭이 46Cm, 두께가 20Cm 이며, 창녕읍 교하리에 있던 것을 광복 후 지금의 자리가 되는 진흥왕순수비의 전면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

 

그 밖에 창녕객사 및 퇴천 3층석탑. 창녕현감비, 6.25 참전비 등이 공원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는데, 많은 주민들이 공원을 방문하면서 휴식과 관람을 겸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관원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창녕객사" >

 

< 창녕읍 퇴천리에 있었던 "퇴천 3층석탑" >

    

< 현감의 공덕을 기리고 있는 "창녕현감비" >

 

< "6.25 참전비" 전경 >

 

4. 창녕 술정리 동 3층석탑 방문.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만옥정공원에서 남쪽으로 한 3-400m 정도 내려가면, 술정리 동 3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아담한 공원에 도착한다.

넓은 잔디공원의 오른편 구석으로 국보 제34호가 되는 높이 5.75m "솔정리 동 3층석탑" 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석탑은 2중기단 위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이라 하겠다.

 

< "술정리 동 3층석탑" 이 있는 잔디공원 >

 

크기와 조각수법은 불국사 석가탑과 비교가 되어질 정도의 기법으로 만들어지므로 통일 신라시대 초기의 석탑으로 위풍이 깃들어져 있다.

1965년 문화재 관리국에서 해체 수리 및 복원을 통하여 사리 7과 및 동제잔형(銅製盞形) 사리용기 등의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국보 제34호 "술정리 동 3층석탑" >

 

< 국보 제34호를 알리는 "술정리 동 3층석탑" 안내문 > 

 

명칭에 동(東) 자를 붙인 것은 한 절터 안에 2개의 탑이 세워져 있어서가 아니라, "술정리(述亭里)" 라는 동일 지역 내에 두개의 탑이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5.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집 구경.

창녕 술정리 동 3층석탑이 있는 잔디공원의 서쪽 면으로 아담한 초가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초가집에서는 조선후기 부터 수 대에 걸쳐 "하씨(河氏)" 가 거주하고 있는 집이다.

 

< 하씨 초가집으로 들어가는 "사랑채" >

 

가옥의 구조와 민가의 건축 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하씨 초가집은 2011년에 사랑채 건물이 건축되었고, 그 사랑채 중간에 있는 대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마당 중심에 주인이 살고 있는 현대식 집이 자리하고 있다.

 

< 마당의 중심에 지어진 "주인 주거집" >

 

현대식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고옥의 초가집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초가집은 4칸의 일자형 홑집으로 왼편으로 부터 건넛방, 대청, 안방, 부엌의 순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집이다.

 

< 일자형 4칸의 하씨 "초가집" >

 

< 제일 오른편에 있는 "부엌" 내부 > 

 

초가집 전면에는 깊게 구성되어진 처마가 만들어져 있고 지붕에는 이엉 대신 억새로 덮혀져 있고, 부엌 뒤편으로 돌아서가면 반간(半間)을 내달아 고(庫)를 만들어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 초가집 왼편으로 작은 곡간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곡간채 한칸에는 창고로 사용하며 다른 한칸에는 디딜 방앗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건물 뒤편으로 높은 축대의 돌담이 병풍과 같이 둘려쳐 있다.

 

< 초가집의 왼편에 있는 "곡간채" > 

 

< 곡간채에 있는 "디딜 방앗간" >

 

6. 창녕 술정리 서 3층석탑 방문.

술정리 하씨 초기집에서 나와 부산으로 가기 위하여 고속도로 인접 지역에 있는 창녕 술정리 서 3층석탑을 찾아 가는데, 이정표 따라 가다가 술정리 서 3층석탑이 200m 전방에 있다는 이정표에서 부터 길이 살아져 다소의 시행착오가 발생하게 만든다.

우여곡절 끝에 고불고불한 논길 따라 조금 돌아서 내려가면, 논의 가장자리에 있는 보물 제520호 "술정리 서(西) 3층석탑" 주차장에 도착하므로 주차하고 나서 석탑을 관람하여 본다.

 

< 논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술정리 서 3층석탑" >

 

높이 5.1m의 술정리 서 3층석탑은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과 옥계석을 올린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전체적인 조각수법은 국보 제34호의 술정리 동 3층석탑에 비하여 다소 떨어지는데, 제작 연대에도 늦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 보물 제520호 "솔정리 서 3층석탑" 모습 >

 

이 밖에도 창녕시가지에 다수의 문화재와 더불어 많은 볼거리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래도 중요한 유적지는 거의 관람이 이루어지므로 부산에서 기다리는 손녀를 위하여 창녕 Toll gate으로 들어가 부산으로 달려간다. - 2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