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서울)

서울 강남 중심지에 있으면서 한국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선릉와 정릉" 관람하면서.

용암2000 2016. 11. 16. 17:34

2016년 11월 5일.(토요일)

 

1. 선릉 및 정릉의 관람 개요.

옛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였던 한 지인의 여식이 토요일 오후 6시 서울특별시 지하철 9호선 선정릉역 옆에 있는 라마다 호텔 2층 신의정원에서 결혼식을 가진다는 연락으로 인하여, 모처럼 한양의 나들이 길로 나서기로 한다.

철도청의 장기적인 파업으로 기차 운행시간에 따라 다소 많은 간격도 있고, 서울에 갈 때 마다 방문하고 싶었던 "선릉(宣陵)와 정릉(靖陵)" 을 한번 돌아보기 위하여 집에서 다소 일찍 출발한다.

서울역에 도착 함과 동시에 지하철 4호선과 2호선을 이용하여 강남에 있는 선릉역에 내려 선정릉역으로 걸어가는 길 중간지점에 있는 선릉 및 정릉을 방문하기 위하여 정문 방향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 "선릉과 정릉" 으로 들어가는 정문 입구에 있는 입간판 >

 

왕릉의 관람 방법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 함과 동시에 출입문을 통과하자 마자 보편적으로 왼쪽 방향으로 들어가 선릉을 먼저 관람한다.

그러고 나서 야산을 한바퀴 돌면서 오른편에 있는 정릉을 관람하고 나서 원점이 되는 정문으로 돌아서 나오는 것이 관람의 순서가 된다고 한다.

 

< "선릉과 정릉" 의 종합 안내도 >

 

< "선릉과 정릉" 을 나타내고 있는 설명문 >

 

입구에 있는 안내원이 아래 방향이 되는 왼편 길을 안내하므로 돌담 길과 함께 하는 오솔길로 조금 걸어가면,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제관들이 머물었던 재실(齋室)이 나타나므로 내부를 관람하기 위하여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 일단의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재실" >

 

< 사랑채와 함께 하는 "솟을대문" >

 

재실은 긴 담장과 함께 중앙에 있는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다소 넓은 마당과 함께 일단의 축대 위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고, 사랑채는 긴 담장의 중앙에 있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하여 "ㄷ" 자 형태의 건물이 된다.    

 

< 재실의 "안채" 가 되는 건물 >

 

< "재실"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재실을 나와 뒤편으로 돌아서 가면 수령 500여 년이 되는 거대한 은행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이 은행나무는 벌써 겨울 채비를 하기 위하여 초록색 빛으로 싱싱하게 자랐던 잎들이 노란색 옷으로 갈아 입고자 변색을 추진하고 있다.

 

< 500년의 수령을 가지고 있는 "은행나무" >

 

다시 오솔길 따라 조금 더 내부로 들어가면 관리소 건물과 더불어 "역사문화관(歷史文化館)"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역사문화관 입구로 들어가면 안내 책상에는 조선 왕실의 가계도 및 세계유산으로 등제하고 있는 왕릉의 분포도 등 다양한 팜플릿을 비치하고 있어 조선 왕실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준다.

 

< "역사문화관" 건물 전경 >

 

전시실 내부로 들어가면 벽면을 통하여 조선 왕실의 계통도와 더불어 TV를 통하여 영상물을 연속적으로 상영하고 있는데, 영상 내용은 선릉과 정릉을 조성하는 과정을 그래픽으로 만들므로 왕릉 내부 구조를 알기 쉽게하고 있다.

 

< 조선 "왕릉" 의 분포도 >

 

TV 옆으로 이동하면 여기에서는 선릉과 정릉의 주인공이 되는 조선 제9대 "성종(成宗)" 과 제11대 "중종(中宗)" 에 대한 년도별 일대기와 더불어 역사적 치적을 잘 정리하고 있는데, 더욱더 조선 왕실의 내면을 알게하여 준다.

 

< 제9대 왕이 되는 "성종" 과 정현왕후와의 일대기 >

 

< 제11대 왕이 되는 "중종" 의 일대기 >

 

< 조선 "왕릉"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조감도 >

 

역사문화관을 나와 다시 선릉 방향으로 올라가면 한그루의 백송(白松)이 자라고 있으면서 나무의 외곽이 하얀색으로 변색 중에 있다.

백송은 오랜 세월의 풍파를 꺽으면서 고목(古木)이 되면 될수록 더욱더 하얀색으로 변색한다고 하는데,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 선생님 생가를 방문하여 보았던 기억을 나게 만든다.

 

< 역사문화관 후면에 있는 "백송" >

 

백송나무를 지나 조금 더 내부로 들어가면, 조선의 왕릉들이 2009년 도 한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제 되어졌다는 입석을 만난다.

입석 뒤편으로 선릉의 영역을 표시하고 있는 홍살문 앞에 도착하는데, 홍살문이 돌담 길과 좁은 간격으로 전체 사진을 남기기에 다소 부적합한 장소가 된다.

 

< 조선 왕릉이 "세계유산" 으로 등제하고 있다는 입석 >

 

2. 선릉을 돌아 보면서.

선릉(宣陵)은 공원의 서쪽 지점에 홍살문과 더불어 정자각을 두면서 양쪽 야산의 정점에 무덤을 두고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이 되는데, 서쪽 야산에는 조선 제9대 성종대왕의 왕릉 및 동쪽 야산에는 계비(繼妃) 정현왕후의 릉이 모셔져 있다. 

홍살문을 통과하면 멀리 정자각 건물과 더불어 그 뒤편으로 성종대왕 왕릉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정자각 앞 까지 박석으로 만든 돌길로 만들어져 있다.

돌길의 왼쪽으로는 약간 높은 신도(神道)의 길이 되고 오른쪽은 약간 낮은 돌길이면서 왕이 다녔던 어도(御道)의 길이 되는데, 일반 관광객은 어도의 길로만 거닐도록 안내문이 붙어있다.

 

< 성종와 정현왕후 묘소 앞에 있는 "신도와 정자각" > 

 

옛 조선 왕이 걸었던 어도의 길 따라 한참 걸어가면 한자의 "정(丁)" 자와 같은 모양의 정자각(丁字閣) 건물 앞에 도착한다.

정자각에서 매년 음력 12월 24일 성종대왕의 제향일(祭享日)과 음력 8월 22일 정현왕후의 제향일이 된다는 안내문과 더불어 제향에서 사용하는 음식물과 더불어 제향을 올리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는 설명문이 놓여있다.

 

< "신도와 어도" 를 구분하여 만든 돌길 >

 

< 정자각 앞에 "제향일" 에 사용한 음식과 설명문 > 

 

정자각 내부에는 제사(祭事) 때 사용하였던 상(床)이 놓여 있으며 건물의 뒤편으로 왕릉(王陵)을 바라볼 수 있는 뒤문이 열려 있지만, 왕릉의 둔덕이 너무나 높으므로 왕릉은 보이지 않고 무덤의 앞자리가 되는 언덕만 보이고 있다.

 

< 정자각 내부 제사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상" 과 더불어 열려 있는 뒤문 >

 

정자각 왼편에는 제사용으로 사용 할 음식을 보관하는 수라간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정자각 오른편에는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인들이 거주하였던 수복방(守僕房) 건물과 더불어 그 뒤편으로 매우 작은 비각(碑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정자각 왼편에 있는 "수라간" >

 

< 정자각 오른편에 있는 "수복방" >

 

< 수복방 뒤편에 있는 "비각" 건물 >

 

이 비각 건물에서 왼편으로 높은 성종대왕 왕릉의 둔덕을 옆으로 두고 다소 완만한 경사면 따라 올라서면 성종대왕의 릉(陵)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전망대에 도착하는데, 이곳 전망대에서 조금 전 힘들면서 올라왔던 풍경이 한폭의 그림과 같이 머물고 있다.

 

< "성종대왕" 왕릉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길 >

 

< 성종대왕 릉 옆에 있는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정자각" 풍경 >

 

간 호흡을 한번 하고 성종대왕의 릉을 구경하여 보는데, 왕릉 주변의 좌우에는 석양과 석사자 각 2쌍이 지키고 있으며 왕릉(王陵) 앞으로는 혼유석과 더불어 망주석, 장명등, 문인석과 석마, 무인석과 석마 등이 자리하고 있다.  

 

< "성종대왕" 의 릉과 함께 하고 있는 망주석 >

 

< 왕릉 앞에 있는 "혼유석, 장명등 및 문인석" 등 석조물 >

 

< 문인석 및 무인석과 함께 하고 있는 "석마" >

 

특히 병풍석 면석(面石)에는 구름 문양 속에 십이지신(十二支神)이 새겨져 있으며 지대석(地臺石)과 만석(滿石)에는 연꽃문양 및 인석(引石)에는 해바라기와 모란 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또한 왕릉 주변에는 상석(裳石) 및 난간석이 있다고 한다.

성종은 1457년 7월 30일 경복궁에서 조선 제7대 왕이 되는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낳는데,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1469년 10월 28일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세조의 비(妃)가 되는 정희대비의 명령(命令)에 따라 13세의 어린나이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른다.

재위기간 중 경국대전을 반포하여 조선의 법전 체제를 완성하였고 조세(租稅) 제도로 관수관급제를 실시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였고, 홍문관을 설치하여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서적을 출판하였다.

이 밖에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여 유교 예법을 확립하면서 창경궁을 창건하였고, 밖으로 윤필상 등을 보내어 압록강 및 두만강 건너 야인을 물리쳐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왕비로는 원빈이 되는 공혜왕후(1456-1474년)는 후사 없이 승하하여 파주 순릉(順陵)에 모셔졌고, 연산군의 모후인 윤씨(1455-1482년)는 폐비가 되어 서삼릉의 회묘(懷墓)에 모시고 계비가 되는 정현왕후(1462-1530년)는 이곳 선릉의 동쪽 언덕에 모셔져 있다.

성종은 3비(三妃) 9후궁(九後宮)에서 16남 12녀를 두고 1494년 12월 24일 창덕궁에서 보령 38세에 승하를 하였는데, 재위기간은 25년 1개월이 되면서 이곳 선릉에 안장하고 있다고 안내 팜플릿에 기록하고 있다.

성종의 왕릉을 구경하고 둔덕을 내려와 오솔길 따라 다시 동쪽 방향으로 걸어가면 멀리 울창한 숲 사이로 거대한 무덤 한기가 보이고 있다.

무덤 앞으로 올라가면 "정현왕후릉(貞顯王后陵)" 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거대한 무덤이 자리하고 있지만, 높은 둔덕으로 무덤은 보이지 않으므로 둔덕 오른편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성종의 왕릉과 동일하게 릉의 오른편으로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 "정현왕후" 무덤 앞에 있는 어도와 둔덕 >

 

정현왕후 윤씨는 영원부원군 평정공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본관은 파평(坡平) 윤씨인데, 1462년 6월 25일에 태어나 1473년 6월에 숙의가 되었고 1480년 11월에 왕비가 되어 중종과 신숙공주를 낳았다.

1530년 8월 22일 경북궁에서 보령 69세로 돌아가 이곳 선릉에 장사를 지내는데, 시호로는 자순대비(慈順大妃)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 하겠다. 

정현왕후 릉에는 성종대왕 왕릉과 차별나게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있는데, 이곳의 석조물도 국조오례의에 의하여 장대하면서도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다.

석조물에는 성종대왕 왕릉과 동일하게 묘소의 주변에는 석양과 석사자 각 2쌍을 비롯하여 혼유석과 더불어 망주석, 장명등, 문인석과 석마, 무인석과 석마 등이 자리하고 있다.  

 

< 병풍석이 없는 "정현왕후" 릉 >

 

< 정현왕후 릉을 지키고 있는 "석양과 석사자" >

 

< 정현왕후 릉 앞에 있는 "혼유석, 문인석과 장명등" >

 

< 정현왕후 릉 앞을 지키고 있는 "무인석과 석마" >

 

< 길 가장자리에 쓰려져 있는 "난간석주" >

 

3. 정릉을 돌아 보면서.

선릉에서 오솔길 따라 한 언덕을 넘어가면 이곳에서 부터 정릉의 영역이 되는데, 깊어가는 가을 풍경으로 많은 관광객과 더불어 어린이들이 선생님 인솔에 따라 왕릉을 공부하는 모습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서울은 정말로 체험을 통한 학습장이 된다.

 

< 선생님과 함께 체험을 통하여 공부하고 있는 "어린이" >

 

< "안내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어린이 >

 

< 왕릉 내부를 거닐고 있는 "관광객" >

 

이어지는 오솔길 따라 계속하여 내려가면 왼편으로 정릉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으면서 이정표 따라 넓은 잔디광장을 빙돌아서 앞으로 나아가면 정릉의 전면이 되는 홍살문에 도착하는데, 홍살문 뒤편으로 강남의 중심지 빌딩이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 "정릉" 앞에 있는 잔디광장과 더불어 강남의 빌딩 군락지 > 

 

홍살문 옆으로 정릉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있어 그 내용을 정독하여 보는데, 정릉(靖陵)은 중종대왕(中宗大王)의 단릉(單陵)으로써 중종은 1488년 성종과 계비 정헌왕후 사이에 태어나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하여 진다.

1506년 9월 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르켜 조선 10대 왕이 되는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을 조선 제11대 왕으로 추대가 되고, 재위기간 중 조광조 등 새로운 학자를 등용하여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고자 현량과를 설치하고 향약(鄕約)을 설치하여 향촌자치를 시도한다.

그의 재위기간 중 서원(書院)을 설립하기 시작하였으며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면서 활자를 개량하여 많은 책을 출판하였고, 또한 북방 야인의 침범을 대비하고 삼포(三浦)에서 왜인들의 난동을 부리자 이를 진압한 뒤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여 국방 체제를 정비하였다.

왕비로는 신근수의 딸인 원비 단경왕후(1487-1557년)는 양주시 온릉(溫陵)에 모셔져 있고, 윤여필의 딸이 되는 제1계비 장경왕후(1491-1515년)는 고양시 서삼릉이 되는 희릉(禧陵)에 모시며 윤지임의 딸이 되는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년)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태릉(泰陵)에 모셔져 있다.

중종도 3비(三妃) 9후궁(九後宮)에서 9남 11녀를 두었으며 1544년 11월 14일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 창경궁에서 승하를 하는데, 재위기간 39년이며 보령 57세 이었으며 1545년 2월 현재의 고양시 희릉에 장사를 지낸다.

그러나 문정왕후에 의해 1562년 9월 4일 이곳 선릉 동쪽 동남향 언덕으로 이장하였는데, 문정왕후도 이곳으로 장사하려 하였으나 한강의 범람으로 홍살문 까지 물이 들어와 이장론(移葬論)이 대두되어 문정왕후는 태릉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 "정릉"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그러므로 정릉은 단릉(單陵)으로 되면서 홍살문과 정자각 및 능침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고, 무덤을 둘려쌓고 있는 병풍석의 면석에서 구름 문양 속에 십이지상이 새겨져 있다.

지대석과 면석에는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고, 인석에는 국화 문양과 더불어 모란 문양이 조각되어 있으면서 문인석과 무인석은 장대하고 선각이 뚜렷하면서 머리가 몸에 비하여 큰 편이라 기술하고 있다.

 

< 홍살문과 정자각 및 왕릉이 일직선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정릉" >

 

여기도 선릉과 동일하게 홍살문을 통과하면 왕릉 앞으로 정자각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홍살문에서 정자각 까지 판석으로 만든 돌길이 만들어져 있다.

돌길 왼편에는 다소 높은 신도(神道)의 길이 되고 한단이 낮은 오른편으로 왕이 다녔다는 어도(御道)의 길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곳에서도 선릉과 동일하게 신도의 길로 걷지 말고 어도의 길로 걷도록 안내문 붙어있다.  

 

< 정자각 까지 "신도와 어도" 로 구분하고 있는 돌길 >

 

무아지경으로 어도의 길 따라 한참 걸어가면, 한자의 "정(丁)" 자와 같은 모양의 건물이 되는 정자각 앞에 도착한다.

정자각에는 매년 양력 12월 9일 중종의 제향일(祭享日)이 된다는 안내문과 더불어 제향에서 사용하는 음식과 제향 행사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고 있다.

 

< 정릉 앞 정자각 입구에 있는 "제향일 음식" 사진 >

 

정자각 내부에는 제사(祭事)를 지내기 위한 상(床)이 놓여 있으며 건물의 뒤편으로 왕릉(王陵)을 바라볼 수 있는 뒤문이 열려 있지만, 왕릉의 둔덕이 너무나 높으므로 왕릉은 보이지 않고 무덤을 지키는 몇 기의 석물들 일부분이 겨우 보이고 있다.

 

< 정자각을 포함하여 멀리에서 바라보는 "정릉" >

 

정자각 오른편으로 작은 비각(碑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비각 건물 내에 있는 비각 전면에는 중종을 나타내고 있는 비문과 더불어 비각 뒤면으로 중종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들이 기록하고 있다고 비각 옆에 있는 작은 안내문이 설명하고 있다.

 

< 정자각 오른편에 있는 "비각" 건물 >

 

이렇게 정릉을 관람하고 나서 다시 홍살문을 통과하여 왔던 길로 되돌아 가다가 왕릉의 좌측으로 출입구를 나타내고 있는데, 안내문 따라 조금 걸어가면 원점회귀가 되는 매표소 정문에 도착하면서 왕릉 관람을 종료하게 한다.

 

< 정릉 옆으로 이어지면서 "출입구" 로 나가는 길 >

 

< 어둠이 내리고 있는 "선릉과 정릉" 정문을 벗어 나면서 >

 

정문을 탈출하여 왕릉을 구획하고 있는 돌담의 옆길 따라 반바퀴 돌아서 가면 선정릉역에 도착하는데, 선정릉역 옆에 있는 라마다 호텔에 도착하므로 예식장으로 들어가 결혼식에 참석하여 본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