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기계과 행사.(충청도)

충남 논산시의 또 다른 명소가 되는 고려의 미소가 머금고 있는 관촉사 "은진미륵" 을 돌아보면서.

용암2000 2017. 3. 11. 22:07

2017년 3월1일. (수요일)


4) 관촉사를 방문하면서.
백제군사박물관을 떠난 차량은 탑정호 반대편에 있으면서 논산 8경 중 제1경이 되는 "관촉사(灌燭寺)" 를 방문하기 위하여 다시 1호선 국도를 이용하여 논산시가지 방향으로 달려가다가, 탑정호에서 흘러내리는 논산천 따라 조금만 달려가면 관촉사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한다.

 

< "관촉사"  앞에 있는 주차장 >

주차장에 집결한 일행과 함께 마을 안길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 따라 조금 걸어가면 길의 중앙에 반야산관촉사(盤若山灌燭寺)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일주문을 만나는데, 반야산은 해발 96.2m 밖에 되지 않아 산이라기 보다 조그만 동산에 속하는 야산이라 하겠다.

 

< 관촉사로 들어가는 도로 중간지점에 있는 "일주문" >

 

일주문에서 다시 조금 더 걸어가면 매표소를 만나면서 입장권을 판매하는 할아버지에게 경로에 따른 무료 입장의 혜택을 받으면서 경내로 들어가면 관촉사의 2번째 관문이 되는 천왕문(天王門)을 만나는데, 문제는 천왕문 처마에 붙어있는 현판의 하늘 "천(天)" 가 독특한 글씨체가 된다.

 

< 매표소와 함께 하고 있는 "천왕문" >

 

험상굳은 표정을 하면서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님에게 간단하게 목례로서 예의를 표시하고 건물 뒤편으로 통과하여 나가면, 높은 계단이 눈앞으로 펼쳐지면서 계단 주변으로 고목의 버드나무 둥지에 세월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지 푸른색 이끼들이 공생하고 있다.

 

< 고목나무와 함께 하는 "지그재그 계단" >

 

지그재그로 만들어져 있는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면 관촉사의 3번째 관문이면서 2층의 망루가 되는 명곡루(明谷樓) 건물을 통과하는데, 1층의 통로 우측 벽면에 관촉사의 건립 내력을 만화로 표현하고 있어 이해를 빨리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관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가 되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에 있는 마곡사의 말사로써, 고려 광종 19년(968년) "혜명(慧明)스님" 이 창건한 사찰이라 한다.

 

< 3번째 관문이 되는 "명곡루" >

 

< "은진미륵" 건립 내력을 설명하고 있는 만화 >

 

이 명곡루 1층의 중앙 통로를 통과하여 일단의 계단으로 올라서면 넓은 마당에 도착하면서 마당 가장자리에 관촉사의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광명전(大光明殿)" 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광명전의 중앙에 비로나자불을 좌우 협신불로는 석가모니불 및 노사나불을 모시고 있는 금당이라 하겠다.

 

<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광명전" 전경 >

 

대광명전의 앞문을 열고 내부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으니 부처님 전(前)에서 향불을 올리는 2명의 불자에게 무뢰한 행동인 같아 다소 미안 함이 발생하여 빠르게 문을 닫고 본당의 오른편에 있는 마당으로 이동하는데, 관촉사 중심지가 되는 장소에 "미륵전(彌勒殿)" 이라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대명광전 내부에서 향불을 올리는 "불자" >

 

< 마당의 중앙에 있는 "미륵전" >


이 미륵전 경내에는 한국의 5대 적멸보궁과 같이 어떠한 불상도 모시지 않고 뒤면에 거대한 유리 벽면을 통하여 석가모니 유골을 봉안하고 있는 무덤을 보고 기도하는 것과 동일하게 이곳 미륵전에도 벽면의 뒤면 통유리를 통하여 은진미륵을 보면서 불공을 올릴 수 있는 구조의 건물이다.

 

< 미륵전 내부에서 바라보는 "은진미륵" >

 

이곳에서도 건물을 통하여 미륵불을 보면서 간단하게 목례를 올리고 나서, 미륵전 건물 오른편으로 이동하면서 건물의 우측 앞에 윤장대(輪藏臺)가 자리하고 있다.

윤장대는 옛날이나 지금 세대에 있어 가방의 끈이 짧은 불자들이 어려운 한자가 되는 불교경전을 읽을 수 없으므로 불자들에게 윤장대를 한바퀴 돌리고 나면, 한권의 경전을 다 읽은 것으로 간주하여 준다는 회전체의 기구이다. 

 

< 대명광전 마당 오른편 구석자리에 있는 "윤장대" >


나도 가방 끈이 짧으므로 윤장대를 한바퀴 돌리고 나서 그 앞으로 나아가니 거대한 바위가 자리하고 있으면서 그 바위 옆으로 해탈문(解脫門)이 자리하고 있는데, 해탈문은 일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석조의 구조물로 만들어져 이곳 관촉사에서만 존재하는 유일한 문이 된다.

 

< 미륵전 오른편 구석자리에 있는 "해탈문" >

 

한때 이곳 관촉사에서는 은진미륵을 보고 기도하면 큰 효험을 얻는다는 소문으로 너무나 많은 불자들이 운집하므로 사람의 숫자를 통제하기 위하여 관촉사 주변으로 성을 쌓아 4곳에 출입문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동쪽에 있는 한개의 석문이 되는 해탈문이 남아 있다고 한다.

 

< "해탈문" 이라고 쓰여 있는 석문 >

 

이 석문 옆으로 사찰의 행사 때 사용하는 종각(鐘閣) 건물과 함께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요사채 건물의 한 코너에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함께 휴식처를 마련하므로 많은 관광객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석문 입구에 있는 "종각" 건물 >

 

< 기념품 및 휴식처를 겸하고 있는 "요사채" 건물 >

 

이 요사채 건물과 미륵전 건물 뒤편으로 관촉사의 명품이 되는 연화 배례석과 함께 하고 있는 5층 석탑과 석등 및 은진미륵이 일렬로 서 있는데, 이 은진미륵은 동양에서 제일 높으면서 다양한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미륵불이라고 한다.  

 

<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있는 "5층 석탑 및 석등, 은진미륵" >   

 

보물 제218호가 되는 은진미륵불(恩津彌勒佛)은 높이가 18.2m 이면서 3개의 돌로써 구성하고 있는데, 3번쟤 관문이 되는 명곡루 벽면에서 보았던 만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은진미륵은 반야산 산기슭 사제촌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는 두 여인이 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 보았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속으로 부터 솟아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바위에 불상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나서 금강산에 머물고 있는 혜명대사에게 그 일을 맡겼는데, 혜명은 100여 명의 석공과 함께 고려 광종 21년(97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하체를 만들고 상체와 머리부분은 인접지역에 있는 2개의 바위를 이동하여 만들므로 각 부위 돌의 색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3개의 덩어리로 이루어지고 있는 불상을 일렬로 세우지 못하고 걱정하고 있던 어느 날 사제총에서 동자 두명이 흙으로 삼등분 되는 불상을 만들면서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 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머리 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혜명대사는 관촉사로 돌아와 그와 같은 방법으로 3개의 덩어리를 모래 사면을 만들어 차례로 운반하여 불상을 세웠는데, 이렇게 탑을 쌓은 방법을 시현한 동자승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화현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고 한다.

고려 목종 9년(1006년)에 불상을 완성하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瑞氣)가 21일 동안 서리면서 미간의 옥호(玉毫)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므로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좇아와 예배를 하였다고 한다,

그 광명의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사찰 이름을 관촉사라 하였고, 또한 미륵불 앞에 은진이라고 붙이는 것은 행정구역이 논산시 은진면(恩津面)에 있기 때문에 지역의 이름을 더 강조하기 위함이라 하겠다.

이 밖에도 은진미륵에 얽힌 많은 영험담이 전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난(亂)이 있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미륵불이 노립승(蘆笠僧:삿갓을 쓴 승려)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든 병사들이 강이 얕은 줄 알고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가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그래서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치자 쓰고 있던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졌다고 하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고, 또한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일행들이 미륵불 마당에서 배회하고 있으니까 한 보살님이 단체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이야기로 은진미륵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장을 찍어 주면서 명부전 옆에 있는 문화 해설사 집으로 가서 해설사에게 관촉사의 내력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하는데, 해설사 집으로 달려갔으나 점심식사를 하려 갔는지 자리에 없어 개개적으로 사찰을 관람하기로 한다.

 

< 지나가는 보살님이 찍어준 "단체" 사진 > 

 

먼저 불상 앞에 있는 팔엽(八葉) 연꼿무늬 3개를 가지고 있는 배례석와 함께 하고 있는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으며 석탑 뒤편으로 보물 제232호 석등(石燈)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석등은 둥근 형태의 원형 돌기둥을 비롯하여 다른 한편으로 4각 또는 8각의 혼합석을 사용하므로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 팔엽 연꼿무늬를 가진 배례석과 함께 하는 "5층 석탑" > 

 

< 은진미륵 앞에 있는 "석등" > 

 

이 석등 뒤편으로 앞에서 건립 설화를 이야기한 은진미륵이 서 있는데, 은진미륵을 자세하게 바라보면 우선 크기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으로 불상을 보면서 예배하기에 경외감을 돋우어 주고 있어 신앙심을 크게 이끌어 주고 있지만 손과 얼굴이 신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크게 표현하고 있다.

 

< 신체에 대비 "손과 얼굴" 이 큰 은진미륵 >

 

불상의 크기에 비해 불신(佛身)의 표현은 매우 소흘하게 하고 있으면서 어깨가 좁고 가슴이나 허리의 구분이 별로 없는 원통형으로 만들어져 있으면서 천의(天衣)의 표현이나 옷주름도 매우 단순하게 처리하고 있다.

 

< 좌측면에서 비라보는 "은진미륵" >

 

이마 위에 늘어진 곱슬 곱슬한 머리카락이나 두 귀의 가운데로 걸쳐 있는 보발(寶髮)의 표현, 또한 허리 밑으로 늘어진 앞치마 처럼 생긴 둥근 옷자락의 표현 등은 고려초 보살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특징이라 하겠다.  

 

< 우측면에서 바라보는 "은진미륵" >

   

이러한 특징은 강릉 신복사지 석조비로자나불상(神福寺址 石造毘盧遮那佛像)이나 연산의 개태사 석조삼존불(開泰寺 石造三尊佛)의 협시보살과 같은 고려 초기의 불상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관촉사 불상은 보다 도식화(圖式化) 되어진 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은진미륵 앞에 있는 기도처에서는 많은 불자들이 소원을 빌면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뒤로하고 사찰 곳곳을 관람하여 보는데, 은진미륵 왼편 언덕 위에 삼성각(三聖閣) 건물이 보이고 있으며 미륵전 죄측면에 명부전(冥府殿) 건물도 보이고 있어 제법 규모를 가진 사찰이다. 

 

< 은진미륵 옆에 있는 "공덕비" >

 

< 야산 중터에 있는 "삼성각" >

 

< 미륵전 뒤편 좌측에 있는 "명부전" >

 

< 사찰 입구 야산에 있는 "정자" >

 

이곳 관촉사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관람을 끝내고 사찰을 벗어나기로 하는데, 점심식사 시간이 너무나 지나가므로 관촉사 입구에 있는 돌체식당을 찾아간다.

돌체식당에는 떡갈비정식과 더불어 갈치정식이 주 메뉴로 요리하고 있지만, 주인장이 현재 시간에서 떡갈비정식을 준비하기에 다소 많은 시간을 요구하므로 다소 비싼 갈치정식을 추천하여 준다. 

 

< 관촉사 입구에 있는 "돌체" 식당 >


어찌한던 돈 보다 시장기가 발동하므로 갈치정식을 주문하여 먹어보는데, 갈치정식 요리가 나오기 전 코스 요리가 나오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간단한 담화를 나누는 것으로 금년 정기총회 공식행사를 끝내기로 한다.

 

< "갈치정식" 을 즐기는 동문 >

 

점심식사를 먹고 나서 인접하게 있는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서울과 대전 동문과의 작별 인사를 교환하고, 영남지역으로 내려가는 동문은 중간지점에 있는 마이산을 구경하고 가자는 의견으로 각자 승용차 네비게이션에 마이산 남부주차장을 입력시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