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 문화와 산행.

백봉회 11월 산행은 구미시에서 거주하는 동문과 함께 합동산행이 되는 "금오산" 에서 개최.

용암2000 2017. 11. 15. 00:01

2017년 11월 12일.(일요일) 

 

금년 백봉회 11월 산행은 구미시에서 거주하는 동문의 초청으로 구미의 대표적 산이 되는 "금오산" 에서 합동산행으로 추진하겠다는 집행부 연락으로, 12일 아침 9시 30분 주어진 장소에 집결하니 총14명이 참석한다.

백봉회장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려가면서 산행에 대하여 협의하는 과정에서 구미에 거주하는 동문 전부는 산행에 동참하지 않고, 하산시간 4시 경에 식당에서 기다리면서 전적으로 뒤풀이 행사를 전담하겠다고 한다.

금오저수지 위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니 마지막 단풍의 풍경을 즐기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버스와 승용차가 주차장을 점유하므로 도로 가장자리에서 임시 주차를 하면서 일행을 하차시키고, 마이크로 버스는 저수지 아래에 있는 대형 주차장으로 이동하였다가 하산시간 4시 경에 다시 올라오겠다고 한다.

 

< 만차의 차량이 주차하고 있는 "금오산" 주차장 >

< 주차장 인근 채미정 앞에 있는 "길재" 선생님의 시비 >

 

오늘 산행을 추진하는 금오산은 구미시가지 남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경사가 급하고 험난한 편이나 산의 정상부는 비교적 평탄한데 이곳에 금오산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원래 이름은 대본산이었는데,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가 되는 숭산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하여 남숭산이라고도 불려졌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던 아도화상이 저녁 노을 속에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金烏山)" 이라고 이름을 짓었으며, 산의 이름에는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도 명명되었다고 한다.

금오산 능선을 자세히 살펴보면 "왕(王)자" 처럼 생긴 것 같고, 멀리 낙동대교를 지나는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바라보면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의 모양도 하고 있어 조선 초기에 무학도사가 이곳의 산을 보고 왕기가 서려 있다고 하였다.

수 많은 등산객과 함께 산행의 들머리로 올라가면 도로의 가장자리에 만추(晩秋)의 단풍이 물들고 있어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특히 금오산 호텔 앞에 있는 메타쉐콰이어 길에 키다리 나무들이 더욱더 빛을 발하는 옷으로 치장을 하고 있다.

 

< 오늘 산행을 추진하고자 하는 "금오산" 전경 >

< 산행의 초입에 있는 "메타쉐콰이어 길" >

 

산행을 하기 위하여 고도를 상승하면 도로 가장자리에 다양한 조형물과 함께 대혜교 다리를 건너면 케이블카를 운행하는 건물에 도착하는데, 대부분 동문들은 걸어서 가겠다고 하지만 무릎 상태가 불실한 나를 포함하여 몇 명은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상부 탑승장으로 올라가기로 한다.

 

< 금오산의 산행 "조감도" >

 

< 산행의 초입에 있는 "조형물" >

< "케이블카" 를 운행하고 있는 하부 탑승장 >

 

나는 수십년 전 금오산 정상에 몇 번이나 산행한 경험이 있는 산이지만 그 때 정상에는 미군이 주둔하는 군사 시설로 정상 꼭지점 까지 올라가지 못하였는데, 현재 미군의 철수로 정상이 열렸지만 한번도 정상을 발지 못하고 미지로 남겨져 있는 산이라 하겠다.

그래서 오늘 기회가 왔지만 그 사이 무릎에서 발생하는 통증으로 가능한 산행의 거리를 짧게 하기 위하여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다소 비굴한 방법으로 산행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어찌하던 문명(文明)의 이기(利器)로 인하여 편리하게 고도를 상승하는 방향으로 결정하였다.

 

< 문명의 이기가 되는 "금오산 케이블카" >

 

만학단풍(萬壑丹楓)으로 수 놓고 있는 대혜 골짜기를 구경하면서 한 5분 정도 시간을 소요하면 케이블카가 상부 탑승장에 도착하면서 건물을 벗어나면 이내 "해운사(海雲寺)" 라는 사찰에 들어가게 되는데, 해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라고 한다.

 

< 해운사의 입구에 있는 "사천왕문" >

 

해운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으며 1925년에 다시 중찬하여 해운암(海雲庵) 이라고도 하였는데, 옛날에 올라 왔을 때에는 대웅전과 요사채 건물만 있었지만 현재는 사찰로 들어가는 사천왕문을 비롯하여 지장보전, 범종각, 산신각, 등 많은 건물이 함께 하므로 너무나 짜임새가 충만한 사찰이다.

 

< 아름다운 단풍과 함께 하는 해운사 "대웅전 및 도선굴" >

                        

< 지장보전 내에 모시고 있는 "지장보살" >

 

무엇보다 해운사는 경내 뒤편으로 기암괴석과 함께 바위 중앙에 도선국사가 머물었던 도선굴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고, 그 언저리로 아름다운 단풍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므로 문전성시(門前成市)의 사찰이 된다.  

사찰을 벗어나 조금 더 올라가면 3거리 이정표를 만나는데, 왼편 계곡 방향으로 대혜폭포와 금오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되고 바로 올라가면 도선굴로 올라가는 길이 되므로 먼저 도선굴 방향으로 길을 잡아본다.      

 

< "도선굴" 방향을 가르키는 이정표 >

 

도선굴로 올라가는 입구에 너무나 아름다운 단풍이 물들고 있어 함께 걷는 일행과 기념사진 한장을 남기고 본격적으로 도선굴로 올라가기로 하는데, 매우 좁은 벼랑길로 인하여 내려오는 사람과 교행을 하기 위하여 많은 기다림을 가지고 나서야 겨우 굴로 올라가는 길이 열린다.

 

< 도선굴 언저리 있는 "단풍" >

< "단풍" 을 배경으로 >

 

안전 난간대와 로프를 의존하여 바위의 가장자리 따라 올라가면 넓고 깊은 도선굴에 도착하는데, 도선굴은 높이 4,5m에 깊이 7.2m, 너비 4.8m가 되는 천연동굴이 암벽에 파혀 있어 대혈(大穴)이라고 불려지며 신라말 풍수의 대가가 되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득도(得道)하여 도선굴이라 하였다고 한다.

 

< "도선굴" 로 올라가는 관람객 >

 

또한 고려말의 충신 야은 "길재(吉再)" 선생님이 대혈사와 굴 아래를 소요(逍遙)하면서 도학(道學)에 전념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 인근 향인(鄕人)의 난(亂)을 피하여 암벽 틈에 기어 오르는 칡덩굴을 부여 잡고 올라와 피난을 하였던 사람이 자그만치 100명이 족하다고 한다.

 

< 매우 큰 천연동굴이 되는 "도선굴" >

 

도선굴에서 구미시가지 방향으로 내려보면 눈 앞에는 조금 전에 탑승한 케이블카가 운행하고 있으면서 그 아래로 금오저수지를 비롯하여 구미시가지가 자리하고 있고, 그 뒤편으로 낙동강을 품으면서 자리하고 있는 구미산업단지의 공장들이 아련하게 펼쳐지고 있다.

 

< 도선굴에서 바라보는 "케이블카와 구미시가지" >

 

산행을 위하여 빨리 도선굴을 벗어나 대혜폭포 방향으로 들어가면 폭포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머물면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데, 대혜폭포(大惠瀑布)는 해발 400m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수직 높이가 27m가 되는 폭포로 여름에는 풍족한 수량으로 물소리가 금오산 전체를 울린다고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 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 "대혜폭포" 앞에서 단풍을 즐기는 등산객 >

< 높이 27m 가 되는 "대혜폭포" >

< "대혜폭포" 를 설명하는 안내문 >

 

< "대혜폭포" 앞에서 여가를 즐기는 등산객 >
 

대혜폭포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 되는데, 옛날에는 매우 급경사의 오르막 길이라 난 코스가 되는 길이 이제는 완전하게 나무테크 길로 만들어져 있어 다소 편리함을 가지는 길이 된다.

 

< 잘 만들어져 있는 "나무테크 길" >

 

계단의 중간중간 금오산 주변에 있는 명소의 사진과 설명문이 붙어있고, 더불어 쉼터가 만들어져 있어 동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10여 분 정도 고도를 상승하면 숨이 하늘 까지 솟아 오른다는 할딱고개에 도착한다.

 

< "할딱고개" 에 있는 바위 전망대 >

 

할딱고개는 암벽 봉우리가 되면서 거의 전망대와 비슷한 다소 넓은 공간으로 이루어지므로 이곳 전망대로 올라가면, 조금 전에 출발하였던 주차장과 도선굴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풍경이 눈 아래로 펼쳐진다.

 

< 할딱고개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도선굴" >

< 할딱고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주차장 및 금오저수지" 방향 >

 

전망대 언저리에 앉아 백봉회가 준비한 돼지고기와 더불어 막걸리 파티를 열면서 즐거운 풍경에 도취하여 보는데, 여기에서 금오산 정상 까지 산행을 하기에 다소 무리가 따르는 동문은 점심식사와 더불어 여유를 가지다가 바로 하산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몇 명은 정상을 도전하기 위하여 출발하기로 한다.

이곳에서 부터 금오산 정상 까지 올라가는 길은 작난이 아닐 정도의 급경사 길이 되므로 정말 인내를 요구하는 길이 되는데, 가도가도 끝이 없는 자갈이 깔려 있어 나는 신발을 통하여 전달되는 무릎 통증으로 쉼의 연속이 된다.

 

<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만나는 죽은 소나무가 "예술품" 으로 변신하면서 >

 

일행 전부는 먼저 올라가 버리고 나와 한명의 동문이 아사직전의 기분으로 약 1시간 정도 올라가니 겨우 산의 능선에 도착하면서 다소 완만한 길이 되고, 한 모퉁이를 돌아서 가면 금오산성 중에서 내성(內城)의 일부분을 만난다.

 

< 급경사의 산행길 능선 지점에서 "마애석불" 로 가는 이정표 >

 

금오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과 정성부에서 북쪽을 향하여 흐르는 큰 계곡을 끼고 포곡식으로 쌓은 외성(外城)으로 구분 되는데, 고려시대 초기에는 둘레 2.7Km 정도의 태뫼식이 되는 내성 뿐이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 선산, 인동, 성주 등의 주변 고을의 주민들이 왜구의 침입을 피하기 위하여 병정을 뽑아 지켰던 산성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 산성의 전락적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므로 연산군 1년(1495년)에 성벽을 증축하였고, 인조 17년(1639년)에 대대적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외성의 북쪽에 있는 계곡을 둘려 싸는 포곡식 산성을 만들어 2중의 성이 되었다고 한다.

 

< 금오산성 중 "내성" 을 지나면서 >

 

내성을 지나고 부터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 길로 이어지는데, 마지막으로 다시 거의 죽을 힘을 쓰면서 한 30분 정도 올라가면 옛 미군 부대가 있었던 자리 바로 아래에 샘이 있으면서 샘에는 수도꼭지가 달려 있으면서 물이 꽐꽐 흐르고 있어 갈증을 해소시켜 본다.

 

< 산의 거의 정점에 있는 "샘" >

 

그리고 바로 뒤편에 있는 넓은 공터에 도착하면서 옛날에는 이곳 공터가 미군들이 하늘로 길을 여는 헬기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현재 헬기장 기능은 잃어버렸지만 아직도 시멘트 포장을 제거하지 않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넓은 공터를 점유하면서 점심식사를 즐기고 있다.'

헬기장 뒤편으로 몇 개의 통신용 탑이 서 있으면서 통신탑을 돌아서 올라가면 금오산 정상 10m 아래 정도 지점에 현월봉이라는 옛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정상석은 한 때 미군 부대로 정상에 오르지 못한 등산객을 위하여 임시로 만든 정상석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 헬기장 뒤편에 있는 "통신탑" >

< 통신탑 인근에 있는 옛 "현월봉" 정상석 >

 

여기에서 고도 10m 정도 더 올라가야 금오산의 정상석이 있다는 안내문 따라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의 가장자리에서 먼저 출발한 동문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는 전화 연락이 도착하므로 그 방향으로 올라가니,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즐거운 점심식사를 하므로 함께 식사의 시간을 가진다.

 

< 정상 바로 아래에서 "점심식사" 를 즐기는 동문 >

 

풍족하게 점심식사의 시간을 가지고 정상으로 올라가 등정식을 거행하기로 하는데, 다소 늦은 시간이 되므로 정상석 주변으로 많은 등산객이 하산 하므로 해발 976m 가르키는 "현월봉(懸月峰)" 정상석 언저리에 서서 힘차게 제307봉 등정식을 거행한다.

 

< 금오산 정상에 있는 "현월봉" 정상석 >

< 정상석을 배경으로 "등정식" 을 거행하고 있는 동문 >

 

정성석을 배경으로 간단하게 등정식을 끝내고 정상 주변을 돌아보는데, 남쪽 방향으로는 구미시가지와 더불어 낙동강 주변으로 자리하고 있는 국가산업단지 공장들이 기간 산업의 원동력이 되고, 그 아래로 왜관읍 까지 아련하게 보이고 있다.

 

< 정상에서 바라보는 "구미시가지와 국가산업단지" >

< 낙동강 하류와 함께 하는 "왜관읍" 방향 >

 

고개를 뒤편으로 돌려보면 김천시의 혁신도시를 비롯하여 김천시가지를 감쌓고 있는 백두대간의 능선과 더불어 황악산 및 추풍령 고개가 희미하게 이어지는 듯 아련한 풍경이 펼쳐진다. 

 

< 아련하게 보이고 있는 "백두대간" >

 

정상에서 너무나 지체하므로 빨리 하산의 길로 들어가기로 하면서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면 3거리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바로 내려가는 길은 조금 전 정상으로 올라왔던 길이 되고 오른편으로 약사암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나는 금일 금오산 정상을 산행한 큰 이유는 약사암을 꼭 구경하고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므로 동문들에게 바로 하산의 길로 가라고 하고 혼자 약사암 방향으로 길을 잡아보는데, 약사암으로 들어가는 일주문을 통과하면 새의 둥지와 같이 바위의 틈 사이로 암자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바위 틈 사이 새의 둥지와 같은 모습하고 있는 "약사암" >

 

약사암(藥師庵)은 거대한 약사봉이라는 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암자로써, 바위의 주변으로 삼성각(三聖閣)을 비롯하여 약사전(藥師殿) 및 요사채 건물과 더불어 출렁다리 끝지점에 있는 범종각 건물이 환상적인 곳에 자리하고 있어 많은 등산객과 불자들이 찾아오는 암자가 된다.

 

<,약사암으로 내려가는 길 초입에 있는 "삼성각" >

 

< 주불을 모시고 있는 "약사전" >

< 출렁다리와 함께 하고 있는 "범종각" >

 

< 거대한 약사봉 아래에 있는 "약사암" 전경 >

 

< 약사암 앞에 있는 "기암괴석과 돌탑" >

< 범종각 건물 앞에 있는 "요사채" >

 

간단하게 약사암을 돌아보고 마애보살입상이 있다는 이정표 따라 산의 허리로 만들어져 있는 길 따라 걸어가면 기암괴석의 밑으로 길이 만들어져 있어 낙석으로 다소 위험도 하지만, 기암괴석 사이 곳곳에 돌탑을 비롯하여 무속신앙의 흔적이 산재하고 있다.

 

< 기암괴석 아래에 만들어져 있는 "돌탑" >

 

한 20분 정도 허리길 따라 걸어가면 마애보살입상이 있다는 이정표 따라 바위 틈으로 올라가면 높이 5.5m 불상이 나타나는데, 이곳에 있는 불상은 너무나 독특한 모양으로 새겨져 있어 정말 신비에 가까운 보살이다. 

 

< 보물 제490호 "마애보살입상" >

 

주변에 기록하고 있는 안내문에는 마애보살입상에 대하여 세부적인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하게 만들어진 시기도 응급하지 않으면서 신라의 보살 보다 늦게 축조되었다고 추정하고, 바위 모서리 부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보살을 새기므로 옆에서 보면 반쪽의 불상이 된다.

 

< 옆에서 보면 반쪽이 되는 "보살" >

 

< 매우 빈약하게 기술하고 있는 "마애보살입상" 의 설명문 >

 

보살의 모습은 바위 모서리 면에서 도둠식으로 새기므로 사람의 윤곽을 제외하고 주변의 돌 전체를 어찌 깍아 내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고, 또한 양쪽 팔의 길이가 너무나 길면서 거대한 귀와 손바닥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불상을 새긴 사람의 의도를 모르겠다.

매우 궁궁증을 가슴에 품고 무아지경으로 거대한 암석 아래로 걸어가 능선의 한 모퉁이를 돌아서 가면 오형돌탑 군락지로 들어가는 문에 도착하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서면 수백의 돌탑 군락지를 만난다.

 

< "오형석탑" 으로 출입하는 나무로 만든 문 >

이곳의 돌탑은 이미 SBS "세상에 이런 사람이" 라는 코너에서 방영을 하여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곳 인데, 금오산 아래 형곡동에서 거주하는 "김용수" 라는 할아버지가 자기보다 먼저 손자가  죽음으로 낙동강에 죽은 손자의 재를 뿌렸다고 한다.

손자 김형석(金亨錫)은 뇌변병 장애로 태어나서 부터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였는데, 이런 아이를 자식과 같이 돌보아 주었지만 손자는 10세가 되는 해 갑작스럽게 패혈증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다.

그 후 할아버지는 손자가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0년 동안 돌탑을 쌓기 시작하였으며, 이곳의 돌탑 군락지를 금오산의 "오(烏)자" 와 손자의 이름에 "형(亨)자" 를 따서 "오형돌탑" 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돌탑" 을 감상하고 있는 등산객 >

 

 

< 10년간 쌓은 "돌탑" 군락지 >

 

 

< "태극기" 와 함께 하는 돌탑 >

 

< 매우 섬세하게 만든 "돌탑" >

 

죽은 손자가 좋은 곳에서 살기 위하여 아름다운 돌집과 더불어 깊은 산속에서도 혼자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놀이시설의 돌탑도 함께 하므로, 할아버지의 정성이 하늘을 찌르고도 넘치는 사랑이 묻혀 있어 발길을 돌리기도 쉽지 않게 만든다.

 

< 중심지에 있는 "오형석탑" >

 

< "형석이" 를 기리는 할아버지 편지 >

 

< 할아버지가 쓴 편지와 함께 하고 있는 "돌탑" >

 

< 할아버지가 쓴 편지 바로 옆에 둔 "탑" >

 

< 오형돌탑 중 "부처님" 과 함께 하는 탑 >

 

< 낭떠러지 돌 위에 놓여 있는 대한민국 "전도와 국기" >

 

< 정교함의 극치가 되는 "돌탑" >

 

긴 그림자가 드리우는 시간이 되므로 빠른 걸음으로 한참 동안 허리길로 돌아서 가면 금오산 정상으로 올라갔던 길과 다시 만남이 일어나면서 급경사의 하산길로 들어서는데, 문제는 수 없이 많은 돌계단으로 무릎의 통증이 극에 달하여 진다.

 

< 돌탑 인접지역 허리길에서 만나는 "너들바위" 군락지 >
 

이런 통증의 현상이 발생하겠다는 예상으로 나는 집에서 가지고 온 스틱을 의존하면서 겨우 한발씩 내려는데, 금오산 정상에서 바로 하산길로 내려가던 동문이 쌓인 낙옆 속에서 잘못 걷다가 발목 관절에 이상이 발생하여 엉금엄금 기면서 하산하고 있다.

두명의 다리 병신이 상호 의존하면서 겨우 케이블카가 움직이는 상부 승착장에 도착 하니, 5시 30분에 운행하는 마지막 케이블카가 내려갈려고 준비를 하고 있어 긴급하게 탑승하여 하부 승착장에 도착한다.

문제는 정상 까지 산행을 하지 않고 중도에서 내러간 동문과 구미의 동문들이 식당에서 기다리면서 한잔한잔 마신 술로 인하여 바리바리 전화가 불티나게 오는데, 오늘 정상으로 산행을 강행한 동문은 완벽한 죄인(罪人)으로 취급을 당하게 된다.

약속시간 보다 2시간 정도 늦게 구미 동문들이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니 그래도 1년 만에 대면하는 동문이라서 그런지 기다림의 지친 얼굴 표정은 살아지고 반가운 조우가 이루어 지는데, 식당으로 입실하자 마자 셋팅되어진 술과 더불어 안주로 먼저 건배사를 올린다.

 

< 구미 동문의 초청으로 "건배사" 를 올리는 만찬식 >

 

그러고 나서 밤이 깊어지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간단하게 저녁식사 시간을 가지고 일행은 대구로 떠나기로 하는데, 그래도 구미 동문은 대구 동문이 자주 찾아와 교류의 장소를 가지면 좋겠다고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