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 문화와 산행.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실레마을 김유정 문학촌 내에 있는 '김유정 생가 및 기념 전시관' 방문.

용암2000 2018. 8. 24. 16:28

다섯째 날.(8월 3일 : 금요일) 

 

3. 김유정 문화촌 방문.(늦은 오후)

지하철 이대역에서 거미줄 같이 엉켜있는 서울 지하철을 이용하여 상봉역으로 다시 와서 경춘선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돌아서 가는 길에 다소 시간적 여유가 발생하여 김유정역에 내려 '김유정 문화촌(金裕貞 文學村)' 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 경춘선의 한 역이 되는 '김유정역' >

 

다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역에서 한 5분 거리에 있는 김유정 문학촌으로 들어가 먼저 김유정 생가 및 기념 전시관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데, 이렇게 생가와 기념 전시관을 빨리 찾아가는 이유는 관람 종료 시간이 임박하기 때문이다.

 

< 먼곳에서 바라보는 '김유정 생가' >

 

< '김유정 생가' 의 조감도 >

 

생가 정문에 있는 매표소로 들어가니 입장권을 판매하는 아주머니가 현재의 시간에는 너무 늦으므로 인하여 입장권은 판매하지 않고, 더위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찾아온 노고에 대하여 잠시 입장하여 기념사진을 남길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겠다고 한다.

정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왼편으로 정원과 함께 생가의 집이 있고 오른편으로 기념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먼저 왼편에 있는 생가의 방향으로 들어가서 구경하기로 한다.

 

< 생가 앞에 있는 '정원 및 정자' >

 

생가의 집 앞에는 정원과 함께 연못 및 정자가 자리하고 있고, 일단의 축대 위로 다소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곡간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편으로 초가집의 생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일단의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생가' >

 

< 생가 왼편에 있는 봄,봄의 '동상' >

 

생가는 사방으로 건물이 둘려 싸여 있는 'ㅁ자' 형태의 초가집 건물이 되어지는데, 대문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아담한 마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건물이 지어진 매우 큰 저택이 되어진다.

 

< 'ㅁ자' 형태로 지어진 초가집 >

 

김유정 생가는 그의 조부(祖父)가 지은 집으로 조부 '김익찬' 은 춘천 의병 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 지원을 하였는데, 당시에는 이곳 증리마을(실레)에서 제일 큰 갑부이면서 주변의 땅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중부지방에서 보기 힘든 ㅁ자 형태로 집을 짓고 기와집 골격에 초가를 얹어 지었는데, 이유는 헐벗고 못 먹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 시절이라 집의 내부를 보이지 않게 하고 외부의 위협으로 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특히 사랑채 아궁이는 집안에 배치하므로 인하여 이곳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면 사랑방 구들을 데우고 왼편에 있는 봉당(封堂)의 굴뚝으로 연기가 나가도록 되어있고, 안채에서 밥을 짓던 부엌의 굴뚝은 생가 뒤편에 따로 있다.

 

< 건물 내부 마당 구석에 매우 낮게 만들어진 '봉당' >

 

부엌의 굴뚝도 봉당의 굴뚝과 같이 높이를 매우 낮게 하여 밥을 짓는 연기가 높게 올라가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마을에서 끼니를 거르는 집들에 대한 배려이라고 한다.

횡하게 생가를 구경하고 나서 생가 오른편에 있는 김유정 기념 전시관을 관람하여 보기로 하는데, 기념 전시관 건물 외형은 팔작지붕의 기외집 형태로 지어져 있어 고풍미(古風美)를 나타내고 있다. 

 

< 생가 오른편 기념 전시관 앞에 있는 '동상' >

 

< 건물의 측면을 출입문으로 하고 있는 '기념 전시관' >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김유정 선생님의 일대기와 더불어 저술한 책을 진열하고 있는데, 김유정은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실레마을에서 아버지 김춘식씨의 팔남매 중 일곱번째로 태어났다.

 

< 만 29년 짧은 삶을 살고 간 '김유정' 선생님의 일생 >

 

< 기념 전시관 입구에 있는 '김유정' 일대기 >

 

어려서 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아파고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언어 교정소에서 말을 고치긴 했으나 그 일로 인하여 늘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지고,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록주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면서 실연과 더불어 학교의 제적으로 인하여 크게 상처를 입고 고향으로 귀향하였는데, 학교가 없는 실레마을에서 '금병의숙(錦屛義塾)' 이라는 야학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고 한다.

 

< 김유정 선생님이 사랑했던 '박록주' >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농촌과 도시의 밑바닥에서 체험한 내용을 소설로 쓰기 시작하였는데,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 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 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 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되고, '노다지' 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면서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 김유정과 함께 활동한 '구인회' >

< '김유정' 선생님이 저술한 책 >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 활동을 벌이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지만 그의 병마가 끊임없이 김유정을 괴롭혔는데,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편지 쓰기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에 짧았던 삶을 마감하는데, 사후가 되어지는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 '동백꽃' 이 출간되어진다.

 

< TV '메스콤' 을 통하여 홍보하고 있는 소설 >

 

< '김유정' 선셍님의 연보 >

 

기념 전시관에는 다양한 서적을 비롯하여 TV 메스콤을 통하여 김유정 일대기를 방영하고 있지만 주어진 시간의 훨신 지나가므로 인하여, 이곳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관람을 끝내고 밖으로 나와 김유정 문학마을과 실레이야기 길을 횡하게 돌아보기로 한다.

 

< '실레이야기 길' 조감도 >

 

< 문학촌 내에 있으면서 문학을 체험하는 '낭만누리' >

 

김유정 선생님의 작품은 실레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소재가 대부분이 되어지는데, 이야기 길 주변으로 디오라마(Diorama)로 만든 모형과 더불어 소설의 내용 일부분을 기술하고 있어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하게 만든다.

 

<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소설' >

 

<  '디오라마' 로 만들어져 있는 실물 모형 >

 

< 소설의 내용 일부 '맛보기' >

 

< 문학촌 내에 있는 '야외 공연장' >

 

실레마을은 춘천시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하게 돌아서 들어가면 만나는 조그마한 마을인데, 마을 앞으로 해발 652m '금병산' 을 비롯하여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이 산속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와 같다고 하여 동네의 이름을 '실레' 라 불려지는데, 현재 실레마을 전체를 빙돌아 보는 트레킹 코스와 더불어 금병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 문학과 겸하면서 산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언제 기회가 발생한다면 다시 찾아와서 산을 오르면서 느근한 마음으로 돌아보겠다는 생각을 간직하면서 다시 김유정역을 경유하여 춘천역으로 달려가는데, 오늘은 동문과 함께 춘천역 인근에 있는 명동 닭갈비촌을 다시 찾아보기로 한다.

 

< 다시 찾아가서 먹어보는 명동 '닭갈비' >

 

춘천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춘천의 명문 춘천고등학교를 지나 5거리에 도착하면서 이곳 5거리 주변으로 유명한 명동 닭갈비촌을 형성하고 있어 다시 찾아가는데, 첫날 Wife와 둘이서 방문한 곳이 되어진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