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시 문화와 산행.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에 있으면서 3대 신비로 지정이 되어진 '표충비' 를 구경하면서.(2)

용암2000 2021. 5. 6. 09:44

 

2021년 5월 4일.(화요일)

 

2. 표충비를 돌아보면서.

 

위양지를 떠난 일행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하여 밀양에서 유명한 맛집을 찾아가다가 네비게이션이 다음 관광지가 되는 표충비가 있는 무안면과 너무나 벗어나므로 밀양시가지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적당한 식사로 민생고를 해결하기로 한다.

이어 밀양시가지에서 창원 방향을 넘어가는 1080번 지방도로를 달려 밀양의 서부권을 형성하고 있는 무안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면서 면사무소 중심지에 있는 표충비각(表忠碑閣)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나는 와이프와 함께 이곳 표충비각을 2013년 6월 24일에 방문하여 나의 블로그에 이미 기술한 경험이 있다.

 

< '무안면사무소' 중심지에 있는 이정표 >

 

표충비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다소 넓은 공터에 거대한 당산나무 한그루가 휴식의 장소를 만들어 주고 있는 공원을 지나면 표충비각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이 되는 삼비문(三碑門)을 만나고, 삼비문을 통과하면 아름답게 깔려있는 잔디밭을 지나면 내삼문이 되는 솟을대문이 자리하고 있다.

 

< '표충비각' 정문 인근에 있는 휴식처 >

 

< 휴식처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 >

 

< 표충비각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 '삼비문' >

 

< 삼비문 옆에 있는 '표충비' 안내문 >

 

< 두번째 관문이 되면서 내삼문이 되는 '솟을대문' >

 

솟을대문을 통과하면서 왼편으로 거대한 향나무 한그루를 만나면서 이 향나무는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하고 있는 '무안리 향나무' 가 되는데, 이곳 향나무는 임진왜란 때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비와 함께 심은 나무이다.

 

< 수령 약 300년이 되는 '향나무' >

 

1742년에 사명대사의 5대 제자가 되는 남붕선사가 표충비를 세우면서 기념으로 이 향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이된 향나무는 20여 그루가 있지만 이런 모양으로 가꾸어진 향나무는 전국에서 유일하므로 경상남도 천연기념물 제119호로 지정 및 관리하고 있다.

이 향나무는 측백과(側柏果)에 속하는 상록 침엽수로 나무의 높이가 1.5m에 가슴높이 둘레가 1.1m이며 수관(樹冠)의 모양은 녹색의 큰 우산과 같이 널게 펼쳐져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원래 향나무는 곧게 자라는 성질의 나무이지만 원줄기를 자르고 옆가지를 팔방(八方)으로 뻗게하여 지금과 같은 나무 모양으로 다듬고 가꾼 것이라고 한다.

 

< 향나무의 '밑둥지' 에서 뻗어나고 있는 가지 >

 

이 향나무를 통과하면서 앞으로 들어가면 표충비각 건물을 만나는데, 비각 건물의 앞 오른편으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표충비 안내문과 함께 비석에서 흘러내린 땀의 내력을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이 나란하게 붙어있다.

 

< 제일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비각' >

 

< '표충비'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비석에서 흘린 '땀' 의 내역 및 량 >

 

2개의 안내문 내용을 읽어보고 나서 그 뒤편에 표충비각 건물 앞에 있는 3단의 계단으로 올라가 보는데, 건물 내부에 오늘의 주인공이 되는 '표충비(表忠碑)' 가 안치되어 있다.

 

< 보호 장벽 속에 갇혀 있는 '표충비' >

 

표충비각 내에 있는 표충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지정된 곳으로 임진왜란 때 승려로써 국난을 극복한 사명대사 '유정(惟政)' 스님(1544-1610)의 충의(忠義) 및 높은 뜻을 새긴 것으로, 조선 영조 18년(1742년)에 사명대사의 5대 법손 남붕(南鵬)선사가 건립한 비석이다.

이 비(碑)의 전면에는 '송운대사(일명 : 사명대사)' 의 행적을 새겨져 있고 뒤면에는 스승이신 청허당 '서산대사' 의 공덕과 '기허대사' 의 사적을 새기고 측면에는 표충비 사적기를 각각 새겼는데, 총 높이가 380Cm에 비신의 높이 275Cm에 넓이가 98Cm 및 두께 56Cm로 그 모습이 장중하다.

표충비는 비석 3면에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일명 삼비(三碑)라고도 불려지는데,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몸통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며 비의 몸통은 검은 색 대리석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이 비석은 일명 '땀 흘리는 비' 라고도 하면서 국가적으로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 변란의 징후가 있을 때 마다 비면(碑面)에 자연적으로 땀방울이 맺혀서 마치 구슬땀 처럼 흐르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나라와 겨례를 염려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고 하여 신선시를 하는 곳이다.

때로 비석의 4면에는 여름날 농부의 이마에서 흐르는 구슬땀 처럼 맺혀 몇일 씩 계속해서 많은 양(量)의 땀이 흐르기도 하고 앞면과 옆면 혹은 한면과 두면에서만 잠깐씩 흐르다가 그치기도 하는데, 신기한 것은 글자의 획(劃) 안이나 머릿돌과 좌대에서는 물기가 전혀 비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표충비각 옆에 있는 홍제사를 관리하는 범철스님은 '겨울철 온도변화에 따른 결로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일반적 결로현상의 경우 물방울이 맺히는 정도이지 마치 사람이 땀을 흥건히 흘리는 것 처럼 많은 양의 수분이 흘러내려 비석 주위에 고이는 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부분' 이라고 말을 한다.

표충비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1910년 국권 피탈,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5말 7되로 최고로 많이 흘림), 1945년 해방, 1950년 6.25 동난, 1961년 군사정변 등 3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 사건이 발생할 때 마다 땀 흘리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비석의 정면에는 ‘유명 조선국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영당비명병서(有明 朝鮮國 密陽 表忠祠 松雲大師 靈堂碑銘幷序)’ 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 및 표충사(表忠祠) 사적기를 음각하여 놓았다.

사명대사 임유정 스님이 무안면 고라리에서 아버지 임수성과 어머니 달성 서씨 사이에 태어나고, 67세로 일생을 마감하기 까지 54년에 걸친 승려 생활을 한 행적과 함께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때의 구국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승병 활동을 한 사실과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내용 및 선조 임금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데리고 온 사실 등도 함께 기술하고 있다.

이 표충비각 건물 왼편으로 쪽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쪽문을 통과하면 '홍제사(弘濟寺)' 경내로 바로 들어가고 다른 한편으로 홍제사 정문으로 돌아서 들어가면 새롭게 만들어진 3층석탑이 마중을 하고 있으며 그 석탑 좌측에는 범종각 건물과 더불어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표충비각 왼편 '홍제사' 를 알리는 안내판 >

 

< 홍제사로 들어가는 '정문' >

 

< 홍제사 마당의 중심지에 있는 '3층석탑' >

 

홍제사는 통도사의 말사로써 1742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 태허당 남붕선사가 조선시대 승병장이 되시는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표충사당과 표충비각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사당 수호사찰이다.
현재의 터에 표충비와 사당을 세우면서 사당을 지키는 수호사찰 역할을 했으나 사당을 표충사로 옮겨지면서 비각의 보호와 관리를 위해 작은 원당과 삼비문(三碑門)을 세운 것이 그 출발이었다고 한다.

사찰 마당을 통과하여 경내 제일 뒤쪽에 도착하면 홍제사의 본당이 되는 '설법보전(說法寶殿)' 이라는 법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경내 입구 현판에는 홍제사가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에 속한다고 하지만 법당에는 대웅전이 아니고 설법보전이라고 쓴 현판이 붙어있어 다소 특이한 사찰이다.

 

< 주불을 모시고 있는 '설법보전' >

 

홍제사와 표충비각의 영역을 구획하고 있는 담장의 제일 앞 쪽에 '표충각(表忠閣)' 이라는 별도의 건물 한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의 내부에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의 영정(影幀) 및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라 하겠다.

 

< 홍제사와 표충비각 영역의 중간에 있는 '표충각' 사당 >

 

< 표충각 사당 내에 모시고 있는 3분의 '영정 및 위패' >

 

이렇게 표충비각 및 홍제사 사찰이 한 울타리 속에 존재하므로 짧은 시간으로 동시에 관람하고 당일로 인접하게 있는 '사명대사 유적지와 영산정사 및 만어사' 까지 관람하기 위해 긴급하게 자리를 떠나기로 한다. -2부 끝-